01. 방랑자
INFO
실제 사건, 인물, 단체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트리거 워닝 요소가 있습니다. (살인, 강간, 성행위, 심한욕설, 19금 등)
사내는 제 몸에 들러붙은 여인들을 내려본다. 맞닿은 살결에서 느껴지는 풍만함과 온기는 겨울바람의 스산함을 잊게 만든다. 이맘때에는 항상 전투에 나섰던 몸이다. 금실로 짜낸 휘황찬란한 옷과 망토대신 갑옷과 짐승의 가죽을 두르고 여인들의 손길 대신 적의 공격을 받아가며 살아남았다. 지옥에서 살아남은 훈장들은 깊고 흉한 흉터가 되어 전신을 메우고 있다. 베이고 뚫리고 꿰이고 찢겼던 모든 흉터들은 사내가 무력으로 쌓아올린 지위와 업적을 증명하는 흔적 중 하나일 뿐이다.
여인 중 하나가 조심스레 제 몸 위로 올라탄다. 뻣뻣하게 발기한 양물이 여인의 몸속으로 파묻혀 사라진다. 자지러지는 듯한 숨소리와 함께 육벽은 능숙하고 절묘하게 양물을 조여든다. 사내는 제 것이 삼켜졌음에도 눈 하나 깜짝않고 여인의 가슴을 억세게 쥐어 주무른다. 다른 여인들이 사내의 몸을 더듬고 핥으며 애무한다. 올라탄 여인은 몸을 위 아래로 들썩이며 양물을 깊이 삼키고 뱉는다. 사내는 잠깐 잠깐 더운 숨만 뱉는다. 발기를 할 정도로 욕구는 가지고 있으나 추삽질만으로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답답하군."
사내는 제 몸 위로 올라탄 여인의 허리를 붙잡아 자리를 뒤바꾼다. 앙탈섞인 비명이 있었지만 사내의 눈은 서늘하기 짝이없다. 제 아래에 깔린 여인의 허벅지를 붙잡아 넓게 벌린 사내는 제멋대로 허리를 놀리기 시작한다. 혈관과 힘줄이 불룩 선 양물이 여인의 몸 속 가장 깊은 곳 까지 머리를 들이받는다. 제 몸을 꿰뚫는 쾌감에 여인은 자지러질듯 울고 비명을 토하며 헐떡인다. 웬만한 사내라면 사정을 하고도 못참아 2차전을 돌입했을 시간임에도 사내의 것은 더 단단히 굳을 뿐이다.
가차없이 살을 찧어내리는 소리가 이어진다. 자신의 추삽질을 받아내는 여인은 여섯, 일곱 번의 절정에 헐떡이는데도 사내는 아무런 감흥이 없다. 기진맥진한 여인의 음부에서 양물을 꺼내자 시뻘겋게 발기한 것이 휑한 공기를 받아 꿈틀거린다. 여인들이 군침을 삼키며 사내의 양물에 고개를 들이밀어 핥고 빤다. 다른 여인의 애액이 묻건말건 신경쓰지 않는 모양새다. 여인들이 입봉사에 열을 올리는 동안 사내는 제 손이 닿는 술잔을 들어 목을 축인다. 적시기는 커녕 몸속을 태울 듯 한 액체가 목을 타고 뱃속으로 흘러들어간다.
술이 건네오는 독기와 같은 열기를 토해낸 사내는 필사적인 여인중 하나를 붙잡아 눕힌다. 기대와 두려움이 섞인 눈빛은 겨우 이어지던 열기마저 사그라지게 만든다. 제 알아서 벌려놓은 다리사이로 귀두를 비비다 힘을 주어 찍어넣는다. 고통어린 쾌락에 헛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들린다. 사내는 제 멋대로 성을 내며 거친 추삽질을 해댄다. 퍽 퍽 찍어대는 소리가 서늘하기 짝이없다. 짐승과 진배없는 사나운 허리짓과 헐떡이는 여인의 신음소리가 넓은 침실 안을 울린다. 여인 하나가 쓰러지면 다음 여인을 끌어다 눕힌다. 다음, 다음, 다음. 사내는 내키는대로 여인을 불러 다리를 벌리고 양물을 쑤셔넣는다.
"다음."
"폐하, 일어나실 시간입니다."
더운 숨을 깊이 토해낸 사내의 명령에, 낯익은 이의 목소리가 목줄을 건다. 척 보기에도 까탈스럽기 짝이없는 얼굴이다. 무엇을 하던 실리와 이득을 따지는데 익숙하며 짐승같은 주인의 목줄을 쥐고 흔들 줄 아는 분위기다. 사내는 술기운이 빠지지 않은 머리를 붕붕 흔들며 정신을 차린다. 제 아래에 깔려 우는 얼굴로 기절한 여인들을 돌아본다. 우는 것이 둘, 기절한 건지 어쩐건지 알 수 없는 것이 다섯. 밤 새 일곱명이나 안았다는 사실보다 아침이 되었다는 사실이 더 침통하다.
"그런 눈으로 돌아봐봤자 해가 산 안으로 돌아가진 않습니다. 폐하."
사내의 생각이 훤히 보인다는 듯, 시종들을 들인 이는 여인들을 하나 둘 치워낸다. 우는 이들은 치료사에게, 기절한 이들은 각자의 방으로. 우는 이 들의 치료가 끝나면 치료사들이 직접 방문하리라. 어찌되었건 황. 제의 여인들이니 죽지않게 보살피는 것은 황실의 의무...는 개뿔이. 재상은 침실에 홀로 남은 황제를 향해 이를 간다. 그가 제 여인들을 어찌 쓰던 재상이 알 바는 아니다. 다만 이렇게 여인들을 쌓아놓고도 결혼은 커녕 자식조차 없는 건 문제가 크다.
재위 20년이 넘었으면 아들은 고사하고 딸이라도 한 명 봤으면 싶다. 하렘의 여인이 세 자릿 수에 달하는데 임신에 성공한 이가 얼마 되지 않으며 임신에 성공해도 출산까지 간 여인은 전무하다. 병이 있거나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경우라면 이해할 수 있다. 개중에는 실제로 병에 걸려 죽은 여인들이 있었다. 문제는 그들의 죽음과 유산을 이끌어낸 자가 황제라는 점이다. 제 자식을 품은 여인들을 증거하나 남기지 않고 죽인 사내다. 임신을 공표하기도 전에 우수수 죽어나가니 보다못한 재상이 황제에게 불만을 토하기까지 했다.
'폐하를 마지막으로 제국의 황실을 완전히 묻어버리실 셈 입니까? 정부라 하더라도 폐하의 여인들이었습니다. 폐하의 씨를 받아 잉태한 아이들입니다. 어찌 이리 쉬이 죽이실 수 있단 말입니까!'
재상도 다른 생각을 해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혹여 여인들 중 정인이 있는지, 외도는 하지 않았는지, 하렘에 사내의 출입이나 접촉은 없었는지. 수 많은 의심과 확인이 이어졌음에도 하렘의 여인들은 결백했다. 황제가 사정을 하지 않더라도, 단순히 몸을 섞기만 하더라도 임신은 가능하다. 황제는 내킬 때 마다 여인을 안으니 그 수가 하루에도 열을 넘길 때가 많다. 임신할 확률이 낮기는 하나 황제의 씨를 잉태하는 여인은 반드시 나왔다. 한 해에 한 두명 꼴이었으니 황손이 최소 스물은 죽었다는 소리다.
하렘의, 정부의 아이는 황손으로 추대받지 못한다. 태어나더라도 어미의 혈통만 인정받으며 황손이 될 유일한 방법은 반란 뿐이다. 그 사실은 재상 또한 뼈저리게 알고 있다. 정부의 자식 중 황손이 된 자들 또한 반역으로 제 아비나 배다른 형제를 베어넘긴 자들 뿐이다. 하지만 현제처럼 황후는 커녕 황비조차 들이지 않는 경우, 정부가 아이를 가지더라도 쫓아내거나 무시할 수 없게 된다. 어미가 어찌 되었든 아비가 황제라는 점은 변하지 않기에 '유일한 황손'이라며 귀족들이 추대할 이유가 되어버린다.
'하렘에서 씨만 품으면 개나 소나 내 자식인가?'
'황제께서 품으신 여인들이지 않습니까!'
'나는 그자들에게 내 자식을 허락한 적 없다.'
허락한 적 없다. 황제는 재상의 불만을 너무나 쉽게 짓밟았다. 자신의 허락없이 생긴 아이는 어찌 되었든 다 죽이겠다는 태도는 상대의 기를 죽인다. 너무나 당연하다는 말투에 재상은 더 이상 무어라 말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버렸다. 그 대화가 있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자식을 허락하는 것은 황제가 아니라 신, 하늘이라 반박해야 했다며 후회한 들 손 쓸 도리가 없었다. 황제는 그 뒤로 네 명의 여인들을 더 죽였고 그 여인들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는 양 묻혀졌다.
"일정은?"
"언제나와 같은 오전 정무와 어전회의가 있습니다. 오늘은 돌아오는 신년파티와 황후책봉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겠군요."
지겹지도 않나. 황제는 짜증스레 중얼거리며 제 발치의 여인들을 치우는 시종들을 돌아본다. 처음에는 황제의 침대와 침실에 널브러진 나체의 여인들을 보고 욕정에 상기된 얼굴들이었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들로 여인들을 겨우겨우 내려보며 더듬더듬 끌어내던 것이 우스웠다. 농지거리 삼아 기절한 여인을 시종의 품에 안겨본 적도 있다. 겨우겨우 받아낸 채 수치를 감추지 못하는 꼴을 보고서 무엇이 그리 유쾌한지 한참을 구경하기도 했다.
"신년파티는 이제껏 하던대로 하면 되지 않겠나?"
"폐하께서 직접 참석하신 횟수는 이번 신년파티까지 합쳐야 네 번입니다. 전쟁 탓에 폐하께서 없으셨던 때처럼 조촐히 하다가는 제국 황실의 얼굴에 먹칠을 하기 좋겠군요."
쯧, 불만스러운 듯 혀를 차는 소리가 난다. 황제가 불만을 토해내든 말든 재상은 손을 튕겨 시녀들을 불러들인다. 황제의 목욕시중과 환복을 위함이지만 황제가 얌전히 있을 리는 없다. 재상은 황제의 침실을 정리시키며 욕실과 이어진 문을 연다. 시녀들이 종종걸음으로 움직이는 통에 부산하기 짝이 없다. 이미 나체였던 황제이기에 탈의를 할 것 없이 터벅 터벅 욕실을 향해 걸어들어간다. 사내들이 평생 달고다녀야 할 양물이 크게 덜렁이지만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오늘 아침은..."
"정무에 맞춰 내도록."
무심하기 짝이 없는 황제의 명에 재상은 별 말 없이 고개를 숙인다. 황제의 목욕시중을 돕는 시녀들이 문을 조용히 닫는다. 침실 청소를 끝낸 시녀들이 체액 가득한 침대 시트와 베개를 들고 하나 둘 물러난다. 대기하고 있던 시종장은 재상의 고갯짓과 눈빛 만으로도 상황을 파악했는지 금방 자리를 뜬다. 새로운 침대 시트와 베개를 들고 들어온 시녀장과 시녀들은 서둘러 침실정리를 끝마친다. 깨끗한 시트와 베개를 보고있는 것 만으로도 만족감이 차오른다.
"재상님."
잠깐의 만족감을 얻어보려던 재상을 향해 시녀장이 조심스레 다가간다. 다른 이가 들을까, 조용히 보고하는 시녀장을 잠깐 돌아본 재상은 한숨을 토해낸다. 이걸로 폐하의 죄가 한 줄 더 추가되겠군. 불만스레 중얼거리는 재상의 목소리에 시녀장은 사색이 된 얼굴빛을 감추지 못한다. 시녀들이 모두 물러났기에 망정이지 얼굴빛을 봤더라면 모든 시녀들이 술렁거렸으리라. 감정과 생각을 감추는 것은 시녀장의 일임에도 재상은 아무 말 없이 시선을 건넬 뿐이다.
"안됩니다. 재상님, 제발 폐하를 막아주셔야합니다."
"폐하께서 정한 것 입니다. 치료사를 통해 이미 보고가 올라갔을텐데 어찌 막아달라 하십니까?"
차분하고 냉랭한 질문에 시녀장은 입을 꾹 다문다. 재상 또한 이렇게 말하고 싶지 않다. 막을 수 있었다면 십 수년 전 그날, 재상이 처음 그 상황을 목격했던 때 부터 막아내고 싶었다. 정부의 아이이기는 하나 황실의 자식이 될 생명을 지켜내고 싶었다. 재상의 간곡한 부탁에도 황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비키지 않으면 함께 베어 죽이고 재상과 여인의 가문까지 모두 묻어버리겠다는 엄포만 내었을 뿐이다. 재상은 끝까지 버텼고 여인은 제 배를 감싼 채 살려달라 빌었다.
황제는 기사들로 재상을 끌어내며 비웃었다. '쓸데 없는 것에 연연하다니, 재상이 될 그릇 치고는 너무 작군.' 하며 재상을 내려보던 얼굴은 아직까지도 선명하다. 비웃음이 분명했다. 얼굴은 웃고있지 않았으나 눈빛은 미친 사람과 다를 바 없었다. 약간의 웃음기와 흥분, 짜증, 귀찮음이 이상하게 뒤엉켜있었다. 황제는 여인을 돌아보며 칼을 치켜들었고 여인의 비명을 베어넘겼다. 제 눈으로는 차마 보고싶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재상이 눈을 떴을 땐, 어깨와 배가 사선으로 베인 여인의 가슴에 칼이 박혀있을 뿐이었다.
재상은 그 이후로도 몇 번이나 황제를 막아보려 했지만 그럴 때 마다 여인들은 더 지독하게 죽어나갔다. 재상이 울부짖으며 검을 든 황제의 손을 붙잡은 채 '차라리 저를 함께 죽이십시요. 저도 죽겠습니다!' 라고 외쳤던 날, 황제는 여인을 내버려두고 돌아섰다. 그 때에는 드디어 황제가 여인을 죽이지 않게 되었구나 안도했다. 우습게도 이틀 뒤, 황제는 제 침실에서 여인의 목을 비틀어 죽였다. 침실에서 홀로 황제를 맞이한 여인은 손가락, 발가락 하나 하나 비틀리고 부러지는 고문을 받다가 재상이 들어서는 그 순간 목이 비틀렸다.
그 뒤로 황제를 말리는 것을 포기했다. 반응을 즐기는 듯한 황제의 행동에 질려버렸다. 전대의 재상, 자신의 조부가 황제를 거스르지 말라 당부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알고싶지 않았으나 알게 되었다. 긴 시간동안 마음을 추스르지 못해 방황하는 동안 몇 명의 여인들이 더 죽어갔다. 그 사이 방황하던 생각은 포기에 이르렀다. 재상은 반발을 멈췄으며 황제는 하던대로 행동했다. 시녀장 또한 황제의 살인을 오랜 시간 아무 말 없이 지켜봐온 인물이다. 이제와 양심의 가책이나 아까운 마음에 행동하는 것은 우습다. 지금의 여인이나 이전까지의 여인들이나 다를 것이 무엇이 있는가.
"폐하의 연식이 마흔을 넘습니다. 더 이상 지체하시다가는 황손을 하나도 남기시지 못할 지 모릅니다."
"17대이신 에이브 폐하는 87세때 아들을 보셨습니다. 지금의 폐하를 보아하니 그보다 더 늙어도 가능하겠군요."
"그, 그게 무슨..."
"시녀장께서 걱정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바는 아닙니다. 허나 폐하께서 선택하시는 일에 우리같은 자들이 반발해보았자 결과가 바뀌진 않습니다."
우리의 반발에도 폐하는 보란 듯 여인들을 잔혹히 죽이지 않았습니까. 시녀장께서 빼돌리려다 실패한 여인들이 어찌 죽었는지,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경고와 비아냥이 섞인 재상의 속삭임에 시녀장은 입을 다물어버린다. 그가 빼돌린 세 명의 여인들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붙잡혀들어왔다. 하나같이 말 못할 고문들을 받으며 죽어갔다. 단칼에 베어 죽는 것이 나을 정도로 느린 고문 끝에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아야만 했다. 시녀장, 시종장, 재상, 기사단장... 황제의 살인을 막으려 한 자들은 모두 그 광경을 보았다.
황제의 곁을 지키는 자 들이 모두 알고 있다면 귀족들 또한 알고 있을진데 그 사실에 대해 함구하고 있는 이유는 두렵기 때문이다. 스물이 채 되지 못한 몸으로 왕이 되어 군대를 이끌고 나선 사내다. 그 누구보다 전장의 필두에 서서 검을 휘두르던 자다. 고문과 암살을 망설이지 않고 왕권을, 황권을 혼자만의 힘으로 다져낸 이다. 그 어떠한 흠과 약점조차 황제를 찌를 무기가 되지 못한다. 임신을 한 하렘의 여인들을 모두 베어내는 사내라는 사실이 절대왕권을 쥔 패자의 명성에 흠을 내지 못한다.
적은 수의 무리가 반발하거나 뒷말을 꺼낼지도 모른다. 트집을 잡으며 황제를 깎아내려들지 모른다. 그러면 어쩌겠는가, 그따위 흠집으로 황제와 맞서보겠다는건가? 목숨이 아깝지 않으면 별 짓을 다 한다하지만 제국의 황제를 적으로 두는 것은 죽느니만 못하다. 하렘의 여인들이 죽을 만 했다. 죽을 만 하다. 없는 이유조차 붙여가며 그럴듯하게 납득해버리면 그만이다. 아이를 핑계로 대어 황제를 치맛폭으로 감싸려 들었다. 이 정도만 해도 충분한 이유가 되어버린다. 강자이기에 뭐든 합리화되는 것이 치졸하기 짝이없으나 모든 이들이 그것을 의심하지 않는 세상에 불만을 토로해봤자 소귀에 경읽기일 뿐이다.
"재상은 그나마 똑똑하군."
"폐하."
그 새 목욕을 끝내고 나온 황제의 목소리에 재상과 시녀장의 몸이 돌아간다. 급히 허리를 숙였음에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아, 황제는 느른한 웃음을 뱉는다. 푹신한 가운을 걸친 황제의 발걸음 뒤로 시녀들이 조심스레 물러난다. 시녀장의 얼굴빛은 더더욱 잿빛으로 물든다. 황제는 별 말 없이 발걸음을 내딛는다.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이 바닥에 늘러붙는다. 황제의 손길에 고개를 든 시녀장은 순식간에 후려쳐지는 따귀에 중심을 잃고 바닥을 나뒹군다.
"시녀장으로서의 노고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엔시어 페리클레스. 하렘의 여인 셋을 빼돌린 벌을 받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면 노망으로 은퇴시켜 줄 의향은 충분하다."
"......"
"오늘 보고에 올라왔을 여자는 약을 먹인 다음 데려오도록."
"알겠습니다."
시녀장이 바닥에 쓰러진 꼴을 보고서 의복을 챙겨 들어온 시녀들이 술렁였으나, 재상의 지시를 받자 언제 당황했냐는 듯 빠릿하게 움직인다. 어디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옷을 걸친 황제는 시녀장이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꼴을 보자마자 손을 젓는다. 시녀들이 시녀장을 부축해 자리를 비운다. 잊을 만 하면 찾아오는 스트레스에 재상은 잠깐동안 깊은 숨을 들이마시고 뱉는다. 그 누구도 아닌 황제가 직접 뺨을 후려쳤으니 몇일간은 뺨이 붓고 입안이 찢어져 말은 커녕 재대로 먹고 마시기조차 어려우리라.
그러거나 말거나. 황제는 불편하게 묶인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발걸음을 내딛는다. 그 뒤를 조용히 따르는 재상의 속이 시꺼멓게 타들어가던말던 신경쓰지 않는 눈치다. 하기야, 황제가 언제 남의 눈치나 분위기를 읽으려 들긴 했던가. 황제의 눈치를 볼 이는 많아도 황제가 눈치를 볼 인물은 없다. 무거운 발소리들이 황제의 집무실을 향해 똑바로 이어진다. 이른 아침의 햇살과 살랑이는 바람이 황제의 백금빛 머리칼을 흐트러트린다.
그로부터 6시간 뒤, 황제의 집무실에서 팔 다리를 잃고 배가 갈린 여인의 시신 하나가 재상과 기사단장의 지휘아래에 조용히 처리되었다.
"아직 연말도 아닌데 북적북적 하네요."
"아가씨, 멀미는 괜찮으십니까?"
"맞어유 아가씨. 마차가 이리 흔들리는데 괜찮으시어유?"
흔들리는 마차 안, 자그마한 창을 가린 커튼을 살짝 걷어낸 틈으로 보이는 길거리는 사람이 가득하다. 아직 연말까지 시간이 있건만, 축제를 위해 모인 것이 아니라면 수도는 평소에도 이리 북적북적 한 것인가. 순수한 감탄을 마지않는다. 맞은편에 앉은 이들은 그러한 여인이 걱정이라도 되는지 목소리에 근심과 걱정이 가득하다. 청년이 여인의 낯빛을 확인하면 중년 여인은 여인의 손을 잡아보며 건강상태를 확인한다. 그렇게까지 마음쓰지 않아도 괜찮지 않나? 싶을 정도로 과보호에 가까운 반응들이다.
그럼에도 여인은 익숙하다는 듯 커튼에서 손을 거두며 웃는다. 힘이 없는 탓일까 금방 흩어질 것 같은 웃음소리는 두 사람의 걱정을 한층 더 두껍게 쌓는다. 평년보다야 건강상태가 많이 좋아진 상태이긴 하다. 몇 년 전만 해도 연말즘 되면 감기와 몸살을 달고 살던 여인이다. 날이 추워지면 평소에도 낮은 체온이 더 낮아져버려 고용인들의 걱정을 달고살던 아가씨다. 그들의 주인이자 아가씨의 아버지인 아히야 남작은 얼마 되지않은 자산을 털어 제 딸의 건강을 돌볼 정도로 지극정성인 이다.
"저는 괜찮아요. 오늘따라 몸이 더 가볍기도 하고..."
"그래도 무리하면 안되어유. 전에도 그러다 쓰러지셨잖유."
걱정 가득한 중년 여인의 말에 아가씨는 그저 웃어보인다. 창백함에 가까운 흰 피부는 어두운 마차 안에서도 반짝반짝 빛이 난다. 호위기사로서 동행한 준은 불편한 마음을 꾹꾹 눌러감춘다. 결혼 적령기임에도 변경의 가문 출신인 병약한 영애는 변변한 혼처가 찾아들질 않았다. 아무리 변경이라 한 들 기사들의 땅이라 불리는 마레아 영지를 지키는 가문이다. 기사출신이라면 모두가 아는 아히야 가문임에도 뻔뻔하리만치 무시당하는 것에 치가 갈린다.
언제 전투가 터질지 모르는 변경의 땅, 힘 없는 가문, 병약한 영애. 모든 것을 끌어안을 정도로 배포 좋은 사내를 찾기란 하늘에 별따기와 가깝다. 남작 또한 혼처가 찾아들지 않음을 짐작했던 모양인지 제 딸에게 수도생활을 할 겸 신년파티에 참석해보는 것이 어떻겠느냐, 조심스레 권유했다. 몇 년이 걸리더라도 좋다. 귀족이 아니라도 좋다. 검을 들 줄 아는 우직한 사내여도 상관없다. 그저 제 딸을 좋아하고 제 딸이 좋다하는 사내를 직접 골라보게 하고싶다는 남작의 뜻이었다.
남작영애, 아가씨는 그러한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려 하지 않았다. 그리하겠노라, 수도로 올라가 더 좋은 치료도 받아보고 괜찮은 사내들이 있는가 찾아보겠노라 했을 뿐이다. 아히야 남작은 병약한 제 딸이 신년파티에 참석하지 못하는 것 만은 막고싶어했다. 마레아와 수도는 마차를 타고 스무날 동안 꾸준히 달려야 도착할 정도로 먼 거리다. 제국 변경이라면 신년파티 한 두달 전 부터 미리 준비해 상경하는 것이 일반적이기도 하다.
허나 무리한 마차행이 혹여 독이 될까, 남작은 석달을 들여 제 딸이 아프지 않도록 아주 천천히 올려보냈다. 남은 스무날만에 올라간다 해서 남작영애까지 그러하리라는 법은 없다. 그 덕분에 수도와 이어지는 모든 마을과 도시를 천천히 구경할 수 있지 않았던가. 남들은 그저 스쳐지나가는 광경이었으나 조금씩 머무르고 쉬어가는 시간은 값지기까지 했다. 오히려 제 영지와 다른 것, 좋은 것, 나쁜 것을 일일히 보아가며 우리는 이리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가.
"곧 저택에 도착할겁니다. 그 때 까지만 참아주십시요."
"아, 여기가 수도였군요."
"저번 주에 지냈던 곳이랑 비슷하긴 했지유?"
"여기가 훨씬 더 북적북적한 것 같아요."
"제국의 수도이니,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청년의 딱딱한 대답에 중년여인이 눈치를 주지만 아가씨는 소리를 죽이며 웃는다. 무뚝뚝한 것 마저 상냥한 사람이다. 농담에 미숙한 사람일 뿐이다. 달각 달각 구르던 바퀴소리가 천천히 잦아든다. 제일 먼저 바깥을 확인하던 준은 마차에서 내린 마부와 저택의 광경에 경계를 푼다. 먼저 마차의 문을 열고 내려간 준은 반대편으로 돌아와 아가씨와 중년여인의 마찻문을 열어보인다. 꿉꿉하기만 했던 마차 안에 바깥의 공기가 섞이자 상쾌함이 솟아난다.
"조심해서 내리십시요."
"고마워요, 준."
마부가 말들을 보는 동안, 준은 아가씨와 중년여인을 차례차례 마차에서 내린다. 언제부터 나와있었는지 중년나잇대의 사내가 깔끔한 정장차림으로 세 사람 앞으로 다가간다. 누가 봐도 '난 이 집의 집사입니다.' 하는 티가 줄줄 흐르는 사람이다. 기척에 예민한 준이 먼저 반응하고 마차에서 내리던 중년 여인이 따라서 눈길을 준다. 마차에서 내린 현기증을 털어낸 아가씨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사내를 돌아보며 익숙한 듯 웃어보인다. 어리고 병약하기만 했던 아기씨가 이렇게 아름답게 성장하시다니, 사내는 맑은 웃음을 감추지 않는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아가씨."
"유어트 집사님."
집사라 불린 이는 낮게 웃으며 아가씨께 손을 건넨다. 체력이 약해, 평소에 걷는 것 조차 아슬아슬하게 보이던 이다. 걱정과 배려가 녹아든 손길에 아가씨는 자연스레 집사의 도움을 받는다. 준은 그 모습이 영 못마땅한 모양이지만 중년여인, 유모는 아무렇지 않은 모양이다. 유어트는 본래 마레아 영지의 수습집사였으나 수도 저택의 관리와 혹시 모를 일들을 대비해 대리집사가 된 인물이다. 아히야 남작가의 집사장이 키운 집사들 중에서 손꼽히게 유능한 자를 믿지 않으면 누굴 믿겠는가.
"건강은 괜찮으십니까? 전년보다 올해가 더 춥다더군요. 아가씨께서 도착하신다는 연락을 받고 저택을 따듯하게 준비했습니다만..."
"그렇게 춥거나 아프진 않아요."
"하하, 네 살 때의 아가씨를 마지막으로 뵌 탓일지도 모르지요. 아직도 걸음마가 어색한 어린 아이가 그려집니다."
제 나잇대의 여자아이라면 토라지거나 툴툴거릴 만 하건만, 아가씨는 별 다른 말 없이 웃을 뿐이다. 아이일 때와 다를 바 없이 희고 부드러운 웃음에 유어트는 헛기침을 하며 제 정신을 환기시킨다. 나이와 성별을 막론하고 홀리게 만드는 아름다운 웃음이라니. 아들만 셋을 둔 입장으로서는 아히야 남작이 부러울 따름이다. 돌아가신 남작부인을 닮은 희게 반짝이는 머리카락이나 투명한 피부에 남작을 닮은 금빛 영롱한 눈동자라니. 무색인이 아니고서야 제국에서 이리 아름다운 백발을 가진 여인을 찾는 것은 하늘에 별따기다.
"앗..!"
"아버... 아니, 유어트님."
"러셀. 견습집사로서의 태도가 아직 잡히지 않은 모양입니다."
"죄송합니다. 러스와 밀러드가 대련중에 싸우기 시작하더니 말릴 수 없을 정도가 되어서......"
"아가씨, 괜찮으십니까?"
유어트와 아가씨의 앞으로 불쑥 나타난 어린 청년. 준이 나서서 아가씨를 감싸지 않았다면 그대로 부딪힐 뻔 했다는 사실을 '견습집사로서의 태도'라는 말로 꼬집어주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다급히 변명을 토해내지만 변명거리로 받아들여지는 것 또한 미지수다. 어찌되었건 아가씨가 부딪히거나 다칠 수 있는 일이었다. 약한 몸으로 넘어졌다가 어디 한 군데 멍이라도 생겼다면 러셀은 견습집사의 자리를 박탈당했으리라. 그게 아니더라도 유어트가 직접 벌을 줄 것은 뻔한 일이다.
"이런. 오늘중에 아가씨께서 오신다는 말을 했을텐데 그러했다는겁니까?"
"대련 중에 아가씨의 호위를 누가 맡을까에 대해서 이야기하다, 서로 하겠다며 싸우기 시작하는 걸 말리지 못했습니다."
수도 저택의 러스와 밀러드는 마레아에서도 유명한 문제아들이다. 대뜸 기사가 되겠다며 아히야 남작에게 편지를 보내질 않나, 수도에서 마레아로 몰래 내려가려다 들키지를 않나, 아히야 영애에게 혼처가 생기지 않자 자신들이 결혼하겠다며 사고를 치질 않나... 비교적 차분하려 노력하는 러셀과는 다르게 러스와 밀러드, 두 아이는 항상 유어트를 곤란하게 만드는 사고뭉치다. 자신만 곤란하게 만들면 참을 만 하지만 주인의 가문까지 불편하게 만드는 점에선 이미 봐주는 선을 넘어섰음이 분명하다.
아가씨가 조심스레 괜찮다고 대답하고 나서야 준은 아가씨를 감싸는 자세를 풀어냈다. 고운 머리카락이 흐드러짐에, 유모가 호들갑을 떨며 아가씨의 옷가지와 머리카락을 정돈한다. 러셀은 죄송함을 감추지 못하고 유어트는 이 아들들을 어찌해야하는가 고민하는 찰나, 준이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꺼내든다. 아가씨가 다급히 말리려 들었지만 저택안을 훤히 알고 있는 준의 발걸음을 막을 사람은 없다. 어차피 두 멍청이가 대련할 만한 장소는 뒤뜰 뿐이니 헤멜 일 또한 없다.
"이자식이! 너 보다 내가 몇 배는 낫거든!"
"웃기지마! 1년 먼저 태어났다고 으스대기냐!"
대련중에 싸움이 났다라. 그 말이 거짓은 아닌지 두 개의 목검이 멀지 않은 곳에 내던져져 있다. 바닥을 나뒹굴며 손발을 아끼지 않는 개싸움을 잠깐 지켜보던 준은 투창을 하듯 칼손잡이를 당겨들더니 전력으로 검을 내던진다. 콱!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에 얼굴을 붙이던 두 아이의 코앞으로 시퍼런 검날이 땅에 박힌다. 싸우는 소리는 커녕 숨소리마저 순식간에 사라진 두 청년의 눈에 제복과 경갑옷을 입은 준의 서늘한 모습이 담긴다.
"러스 시릴, 밀러드 시릴."
"ㅇ, 예!"
"넵!"
"준, 안되유! 아가씨께서 안된다고 하셨...."
"목검을 들고 덤벼라."
아이고 맙소사. 유모의 말은 귓등으로 흘린 준의 명령에 러스와 밀러드가 눈을 꿈벅인다. 준, 준...? 준 클로드? 마레아의 기사들 중 몇 안되는 무색인이자 손꼽히는 무술실력을 가진... 아가씨 전속 호위기사 중 필두라 불리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정신이 들었는지 두 사람은 아직까지 바닥을 뒹굴던 몸을 벌떡 이르킨다. 준이 여기에 와서 싸움을 막아섰다는 건 아히야 남작영애가 도착했다는 소리다. 겨울날 내리는 첫 눈보다 하얗고 투명하기에 그만큼 아름답다 칭해지는 여인이 도착했다는 건 좋은 소식이다.
좋은 소식이겠지. 두 청년의 눈을 지켜보던 유모는 한 숨을 쉬며 몸을 돌린다. 저들의 머릿속에 어떤 꽃밫이 존재하는진 알 수 없다. 허나 남의 머릿속을 읽는 능력따위가 없더라도 오래 살며 생긴 눈치만으로 두 멍청이의 미래를 읊어낼 수 있다. 열혈 바보인 두 청년은 눈앞의 준보다는 소문의 아가씨가 궁금해 발을 내딛을테고 동시에 죽지 않을 만큼 밟힐 것이다. 아가씨께서 '안돼'라 하기는 하셨으나 그게... 어디... 저 멍청이들에게 통해야 안된다 된다를 따질 수 있지...
"영애께서 오셨... 끅!"
"아가씨도 오신... 컥!"
준의 명령보다 저들 생각에 빠진 두 청년이 준에게 다가가자 마자 복부를 얻어맞는다. 힘조절을 했기에 토악질은 하지 않겠지만 눈앞이 핑 도는 정도는 되리라. 두 청년이 바닥에 엎어져 끙끙거리는 모습에 준은 아주 맑은 웃음을 보인다. 안그래도 아가씨를 호위하느라 두 달 넘게 대련을 하지 못했다. 일방적으로 개패듯 패는 일 이기는 하나, 눈앞의 바보들에게는 충분한 단련이 되리라. 적어도... 죽어라 얻어맞고서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지는 배우겠지.
"일어나라. 호위를 하려면 급히 단련해야 하지 않겠나?"
"그, 그럼..."
"오늘 단련을 버티면 고려해보지."
뻥이다. 유모는 준의 당당한 거짓말에 고개를 젓는다. 오늘 단련? 빨랫감을 몽둥이로 두드리는 것 보다 더 꼼꼼히 두드려 팰 인간이다. 버티기는 커녕 나가떨어져 몇일 간 누워서 살아야겠지. 적당히 하라는 말 조차 아까운지 유모는 몸을 부르르 떨다 말고 자리를 떠나버린다. 그 둘의 형인 러셀은 제 아버지인 유어트에게 잠깐 잔소리만 듣고 끝났지만 러스와 밀러드는 해 지는 저녁까지 얻어맞게 되리라. 그마저도 준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게거품을 물 정도로 패서 기절시킬 예정이다.
이전부터 다른 기사에 비해 비교적 작은 준의 키와 적당한 체구를 보고 무시하던 수습기사들이 많이 당하던 방식이다. 아침부터 밤까지 먼지가 아니라 불이 날 정도로, 기절할 때 까지 패면서 태도를 고쳐먹게 바꾸는 것은 준의 일상인 일이다. 평소에는 목검을 이용한 대련이나, 지금은 목검도 필요없다. 쓸데없는 욕심에 실룩거리는 바보들에게 목검은 아까운 법이다. 경갑의 건틀릿을 벗고 손목을 푼 준은 '으랴!' 소리를 내며 반격하려던 두 멍청이들의 등을 찍어내린다.
준이 집사의 두 아들들을 가지고 먼지를 피워내는 동안, 아가씨는 집사가 내려준 홍차를 홀짝이고 있다. 방의 자리가 자리인지라, 준이 때리는 소리나 두 청년들이 앓는 소리가 간간히 들리지만 싸움을 말리는 것을 포기하고 돌아온 유모가 창문을 닫자 그조차 들리지 않는다. 자그맣게 잘린 케이크가 제 접시에 있음에도 아가씨는 포크조차 들어올리지 않는다. 마차를 오래 탄 탓에 속이 미식거리는걸까. 걱정스러운 유모의 시선에 아가씨는 그저 소리없이 웃는다. 속은 괜찮은데 모두가 자신을 걱정하는 분위기가 부담스러울 뿐이다.
"유어트 집사님께는 죄송해요, 준이 한 번 화를 내면 저도 말리기 힘들어서..."
"아닙니다. 기사가 되고싶다 했으니 이런 대련도 필요한 법이죠."
능글맞은 집사의 대답에 아가씨는 작게 웃음을 터뜨린다. 기사끼리도 대련을 하려면 어느정도 실력이나 궁합이 맞아야 한다. 준과 러스, 밀러드는 그 궁합이 극악이라고 할 정도로 나쁘다. 실력차이가 크기도 하고 바보형제에게 손대중을 해줄 정도로 준이 상냥하질 않다. 유어트의 뒤에서 티포트를 정리하던 러셀은 아가씨의 웃음에 귀까지 붉게 달아오른다. 예쁘다. 예쁘다는 말로 부족할 정도로 예쁘다. 소문으로는 샤하르 후작가의 아가씨가 가장 아름답다 칭송받는다지만 러셀은 그 소문을 부정하고 싶어졌다.
그 여자가 얼마나 예쁜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아가씨만 못하리라. 화려한 드레스나 치장이라 할 것이 하나도 없다. 화장마저 옅어서 티조차 나질 않는다. 그럼에도 이렇게 예쁜 아가씨다. 누굴 갖다붙여도 이기지 못하리라. 마레아 영지는 척박한 만큼 미인으로 유명하다 했다. 그 이유를 알 것만 같다. 넋이 나간 채 미소를 바라보던 러셀은 제 아버지의 작은 경고에 깜짝 놀라 자세를 다듬는다. 하마터면 티포트에서 물을 쏟아버릴 뻔 했다.
"러셀이라고 했나요?"
"네, 러셀 시릴이라 합니다. 편하게 셀이라 불러주세요, 아가씨."
"그러면... 셀?"
아가씨의 낭랑한 목소리가 제 이름을 부르자 묘한 짜릿함에 러셀은 입을 꾹 다물다 뒤늦게 '예, 아가씨.'라 대답한다. 바보 동생들아, 미안하다. 이 형님이 먼저 아가씨를 보필하게 되겠구나. 묘한 쾌감에 마른 침이 넘어간다. 유어트는 제 아들이 기대감과 흥분에 눈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음을 눈치채고 마음속으로 깊은 한숨을 뱉는다. 집사가 되기 위해서는 감정을 최대한 숨기고 보필하는 것에 집중하라 그리 일렀건만, 아비된 자가 보기에 제 동생들이랑 다를 것이 없다.
"제 나잇대에 맞는 영식, 기사분들의 목록과 정보가 준비되었다고 들었어요."
"예. 아ㅂ... 유어트님의 집무실에 정리되어있습니다."
"가져와주시겠어요?"
"지금 말입니까?"
놀란 듯한 목소리에 영애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되었건 시집을 가기 위해 수도까지 올라온 몸이다. 제 가문과 이름이 얼마나 될진 모르겠으나 가주인 아버지의 결정을 거부할 정도로 영애는 순진하거나 멍청하지 않다. 기왕이면 자신을 좋아해주는, 좋은 남자를 만나 결혼하고 싶은 것이 여인의 마음이다. 그러려면 사람들을 알아야하고 파티와 티룸에도 참가해야하며 몸관리도 철저히 해야한다. 귀족의 결혼은 하루 이틀로 끝날 일이 아니니 준비는 빠를 수록 좋다.
"여독이 풀리지 않으셨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여독이 풀릴 동안 읽어보려고 해요."
걱정섞인 유어트의 질문에 아가씨는 차분히 대답한다. 무언가를 읽는 것은 여독풀이에 큰 방해가 되지 않으리라는 판단일까. 차분한 대답이 만족스러웠는지 유어트는 고개를 숙여 복종의 태도를 보인다. 머뭇거리던 러셀은 제 아버지의 반응을 보고 똑같이 복종하듯 허리를 잠깐 숙였다가 자리를 벗어난다. 아가씨의 명령을 따르려면 잠깐의 시간도 모자라다. 평소에도 제 아버지의 일을 돕던 덕에 이런 일에는 이골이 났다는 점이 다행이라 할까.
아무래도 아가씨의 혼처를 구하며 아히야 가문의 새 주인을 찾는 것이 쉽지만은 않겠구나. 러셀은 저도 모르게 미래를 걱정하며 발걸음을 서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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