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20. 02:38

03. 나쁜 징조


INFO

 실제 사건, 인물, 단체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트리거 워닝 요소가 있습니다. (살인, 강간, 성행위, 심한욕설, 19금 등)



 헤조그 잭 카플커프 폰 그림, 통칭 카플커프 공작. 그는 행복해야 할 신혼임에 불구하고 황궁으로 출근한 것이 못내 못마땅한 표정이다. 제 침실에서 부인과 한창 뒹굴어야 할 시간에 급히 불려나왔으니 날이 날카롭게 서있을 수 밖에 없다. 누구라도 그러리라. 자리에 있는 보좌관들은 모두 숨죽인 채 공작의 기분에 공감한다.


 솔직히 신혼이 아니더라도 황제의 살인적인 업무일정을 보조하려면 신경에 날이 선다. 실수는 용납지 않은데 일거리는 끝이 없고 하나라도 잘 못 넘겼다간 무시무시한 불호령이 떨어진다. 특히나 제국의 영주들이 보내오는보고서와 감시관이 보낸 보고서, 실제로 보내온 세금의 확인서를 꼼꼼히 비교해 내야만 한다.


 본래라면 재상, 재무관리장들이 관리감독을 해야 하는 일이다. 카플커프 공작은 무인 출신이다. 영지를 소유하고는 있으나 산하의 귀족들이 관리하며 적당히 최종결제만 받아내는 수준이다. 그렇다고 직접 관리하지 못하는 인물은 아니다. 결혼 전일 때만 해도 집무실에 틀어박혀 모든 서류를 일일이 처리했다. 공작이 영지관리에서 손을 뗀 이유는 순전히 공작부인과의 신혼생활을 더 즐기고 싶은 욕심 때문이다.


 공작부인이 알면 질겁할 일이다. ‘이게 무슨 짓이에요! 일을 남한테 떠넘기면 어떻게해요! ’라며 공작의 등을 찰지게 두드릴지 모른다. 그렇다 해서 눈 하나 깜짝할 공작이 아니다. 자그마한 손으로 때려봐야 별 일 있겠느냐는 표정으로 묵묵히 얻어맞으리라. 공작부인의 힘이 빠질 때 즘 기세를 잡아 침실로 간다는 이야기는 제국 내 모르는 이가 없다.


 “끝났습니까?”


 소문의 근원지 중 하나인 재상이 방금 자고 온 인상을 감추지 못한 채 재무관료들의 집무실로 들어선다. 제일 상석에 앉아 서류들을 확인하던 공작은 미간의 혈관 중 하나가 두껍게 돋아나는 것을 감추지 않는다. 손에 들린 깃펜이 당장에라도 우그러질 듯 떨린다. ‘일이 밀려 죽겠으니 도와달라’는 소식을 무시하려 했으나, 공작부인이 어서 가보라며 등을 떠민 탓에 사흘동안 갖혀있었다.


 “끝났겠나?”


 “거의 끝나가는 걸 괜히 성질내고 있기는.”


 “…….”


 불만 가득한, 비꼼에 가까운 질문에도 능청맞게 대답한다. 공작이 희생한 3일의 시간동안 먹고 자고 쉰 덕에 관짝에 뉘인 시신 같던 재상의 얼굴이 조금 밝아 보인다. 정확히 말하면 좀 죽겠다 싶은 표정이지만 죽은 얼굴보다는 나은 정도다. 쥐고있던 서류의 빠진 점, 확인이 다시 필요한 점 등을 짚어낸 공작은 제 이름으로 결제한 것들만 재상을 향해 손짓한다.


 재상 또한 공작위를 가진 귀족이다. 같은 공작으로서 ‘들고 꺼져.’ 에 가까운 명령이 불쾌할 만도 하건만, 눈 하나 깜짝않고 관료들을 불러 서류더미를 옮기기 시작한다. 황제의 마지막 확인과 함께 서명이 적힌다면 한 해의 세금납부가 완료된다. 만약 한 가지라도 문제가 생긴다면 황궁에서 사람을 보내 영지의 모든 자금을 하나부터 열까지 확인한다.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면 다행이다. 계산오류는 흔히 있는 일이니 걱정할 필요 없다. 문제는 영지 내의 혈세, 영주의 탈세, 탈루 등의 행위다. 제국은 영주의 지배는 인정하되 과한 세금책정은 인정하지 않는다. 만약 영지세를 이상한 곳에 쓰기라도 한다면, 그것을 황실에 들키기라도 한다면 그 뒤가 어찌되는지는 지난 40년간 이어진 선제와 현제의 처리 방법을 모르는 이는 없다.


 탈세를 주도한 자의 머리를 베고 그 집안 사람들은 모두 잡아들여 지위와 재산을 박탈하고 국외로 추방한다. 영주는 가담의 수준에 따라 사형, 귀족위 박탈, 재산몰수, 작위강등 등을 당한다. 만에 하나 황궁에서 보낸 재무관들이 돌아오거나 연락이 끊긴 경우 황제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영지로 내려가는 초유의 사태까지 벌어진다.


 지금까지 황제들을 직접 행차하게 한 귀족가는 다섯곳이 채 되지 못한다. 그들 모두가 이름있는 권세가이며 귀족무리의 우두머리격인 이들이었다. 아무리 황제라도 멸문시키진 못하리라. 굳게, 당당하게 여기던 이들이었다. 기세와 기대는 좋았으나 두 황제들은 그들의 기대와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었다.


 선제는 그들의 영리한 듯 멍청한 행동들을 꾸준히 비웃었다. 아무리 황제라도 이럴 순 없다 외치는 귀족들의 머리를 직접 베어넘기며 짓밟았다. 현제는 그들을 비웃거나 놀리지 않았다. 그저 덤덤히 죽일 뿐이다. 다만 죽이는 방식이 너무나 잔인했기에 두고두고 회자되었다. 숨이 붙어있는 채 육편이 되어가는 자들의 비명을 끝까지 들어야했던 이들은 황제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게 되었을 정도다.


 공작은 제 손아귀에 들려있던 마지막 서류를 눈앞의 보좌관의 책상 위로 던진다. 잘못된 것, 빠진 것, 확인되지 않은 것을 일목요연하게 적힌 글에 피곤함이 가득한 보좌관의 눈이 퀭하게 질린다. 너무 피곤한 탓에 놓친 것 들이 많을 뿐, 평소에는 능력있는 인물임을 알고 있다.


 공작은 정리된 제 테이블을 잠깐 둘러보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다. 사흘동안 아무것도 못하고 집무실에 처박혀있었더니 온 몸이 뻐근하다. 저택으로 돌아가 몸을 풀고 아내와 시간을 보낸 후 쉬어야만 한다. 목을 움직여 뻐근함을 풀어내는 공작의 모습을 부러운 듯 올려보던 보좌관들은 금세 눈을 떼고 제 일에 집중한다, 부러워하기보다 한 줄이라도 더 확인해야 빨리 퇴근하는 법이다.


 “먼저 가지.”


 “들어가십시오.”


 “수고하셨습니다, 공작님.”


 서류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급히 대답하는 이들을 뒤로한 채, 공작의 발걸음은 빠르게 내딛어진다. 마부에게 서두르라 명한다면 점심식사까지는 늦지 않으리라. 사흘동안 씻지 못한 것은 찝찝하나, 식사 전에 씻는다면 문제없다. 피곤함에 눈꺼풀이 무거워져, 마른 세수를 하면서도 발걸음의 속도는 느려지질 않는다.


 아내가 보고싶어졌다. 당장 보지 않으면 눈에 뵈는 것이 없어 질 정도로 간절해졌다. 얇은 허리를 끌어안고 긴 머리를 쓸어넘기며 앳된 속삭임을 듣고싶어졌다. 응큼한 공작님, 이라며 장난스레 투정부리는 것이 듣고싶다. 작은 손으로 건네오는 것이라면 끔찍하게 단 것도 상관없다.


 “젠장.”


 황궁은 왜 이렇게 쓸데없이 넓은거지.


 공작의 발걸음이 뜀박질에 가까워진다.


 




 카플커프 공작부인은 제 하녀들과 공작가 기사들의 호위를 받은 채 살롱의 한 자리에 앉아있다. 검은 머리카락은 틀어올리기 아까울 정도로 윤이나게 찰랑인다. 요즘 유행하는 드레스는 넘칠 정도로 풍성하고 화려하다. 보석과 레이스를 주렁주렁 장식해 걸을 때 마다 화려함이 넘치는 것을 선호한다. 공작부인은 독특하다 할 정도로 차분한 드레스를 좋아한다.


 스커트를 부풀리기 위한 페티코트나 크리놀린은 필수적이라 할 수 있으나, 공작부인은 그마저도 불편하다는 이유로 싫어한다. 공작은 제 부인이 어떤 드레스를 입던 신경쓰지 않는 인물이니 그렇다 하더라도 유행을 따르는 귀족 여인들에게 좋아보일 리 만무한 태도다. 혼인 전부터 ‘평민’이라며 색안경을 쓰던 이들은 혼인 후에도 공작부인의 혈통을 운운하기 바쁘다.


 ‘부족한 혈통을 가진 여인이라 그런지 옷 입는 것 마저 수준떨어지네요.’


 ‘누가 평민 아니랄까봐, 입는 드레스 수준하고는…’


 ‘풍성한 드레스가 싫은게 아니라 제 주제를 아는거죠. 귀족처럼 꾸며봐야 수준이 드러나는 것 말고 남는게 있나요?’


 ‘카플커프 공작께서도 불쌍하시지. 저런 여자에게 홀려서 무슨 수모래요?’


 살롱에서마저 노골적으로 들려오는 적의섞인 악담에 하녀들은 고사하고 기사들마저 안색이 어두워진다. 공작께서 자리해 계셨다면 한 마디도 넘기지 않았을 모욕들이다. 공작부인이 ‘시끄럽다.’ 한 마디만 하면 모두 무릎꿇려 목을 베어낼 수 있다.


 황제의 최측근이자 검이라 불리는 카플커프 공작가. 가문의 유일한 여주인을 대놓고 모욕하는 짓거리를 참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다. 공작부인께 기사의 맹세를 마친 이들은 불쑥불쑥 솟아나는 살의를 억지로 짓누른다. 얼굴표정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으나 눈빛만으로도 참수를 끝낼 듯 보인다.


 “마님.”


 공작부인의 전속시녀인 알리사가 걱정스레 말을 붙인다. 공작부인은 다 식어버린 찻잔을 내려놓고 서늘하게 웃는다. 평소의 해맑고 순수한 웃음은 어디가고 차갑게 말라붙어 식어버린 미소에 전속시녀는 저도 모르게 마른 침을 삼킨다. 이럴 때 보면 공작님과 공작부인 마님의 미소가 너무나… 너무나 닮아보인다.


 “괜찮아요.”


 괜찮지 않으시잖습니까. 모두의 눈빛이 그렇게 말하는 것을 알고있음에도, 공작부인은 그저 소리없이 웃는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평민 출신의 공작부인은 어디를 가든 눈총을 받고 눈치를 보게 되는 입장이 되었다. 공작의 구애를 받아들였을 때 각오한 일이었다. 새삼스럽게 상처받고싶지 않았으나, 상처받게 되는 것은 사람인 탓이리라.


 공작부인이 눈 하나 깜짝않고 그들의 뒷담을 무시하자 약이 오르는지 눈빛에 더 날이 선다. 그래봐야 얻을 것 하나 없을텐데. 공작부인의 시선과 그들의 시선이 잠깐 마주치자 화려한 부채를 흔들며 콧대높게 웃어보인다. 오, 세상에. 할 일 없을 때 읽었던 로맨스 소설의 악녀들이나 보일 법 한 웃음이라니. 그런 소설에도 고증이라는 게 있었구나. 새삼스러운 감탄을 떠올린다.


 “카플커프 공작부인. 오랜만에 뵙네요. 올해 신년파티때 뵈고 난 이후 뵌 적이 없는 것 같군요.”


 “반가워요, 르로이 백작부인.”


 이름은 기억하고 있잖아? 하긴, 그정도 머리는 되어야 공작을 홀려 부인 자리를 꿰차지. 하는 속내가 눈빛으로 훤히 읽힌다. 귀족이라면 조금 더 머릿속의 생각을 감춰야하지 않을까. 차게 식은 찻잔을 흘끗 바라보던 공작부인은 차게 식은 눈빛마저 속으로 꾹꾹 눌러 감춘다.


 “자비로운 공작부인과 개인적으로 차를 한 잔 할 수 있는 시간을 받을 수 있을까요?”


 너랑 차 한잔 하는 척, 말트집 잡아서 괴롭히고 싶다는 말을 이렇게나 고급스레 돌려말할 수 있다니. 참으로 유려한 말솜씨가 아닐 수 없다. 귀족적인 대화라면 제국 황실 도서관에서 지냈을 때 질리도록 들었다. 귀족의 대화법에 익숙치 않은 사서들을 비꼬듯 모욕하는 귀족은 심심치않게 있었다.


 “알리사, 살롱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서 새 차를 받아와주렴.”


 “예, 마님.”


 “어머나, 감사해라.”


 허리를 깊이 숙이며 트집잡히지 않을 솜씨로 자리를 비운 하녀를 힐끗 바라보던 르로이 백작부인은 자연스럽게 공작부인의 맞은편에 앉는다. 몸가짐은 더할나위 없이 단정하고 차분하여, 귀족적인 분위기를 풍기는데 여념이 없다. 태도만큼 좋은 인성을 가졌으면 좋으련만.


 실망스러운 기색을 숨긴 공작부인을 위 아래로 훑어보던 백작부인은 간을 보듯 입을 연다.


 “공작부인께서는 아직도 크리놀린을 걸치지 않으시는군요. 귀족 여인이라면 필수건만, 아직도 불편하신가요?”


 귀족여인이라면 반드시 입어야 할 옷도 입지 못하는, 분수에 넘치는 자리를 꿰찬 년. 그리 말하는 것 같은 기분에 공작부인은 뒤집어질 것 같은 속을 참는다. 상대의 말을 넘겨짚는 것 만큼 쓸모없는 행동이 없을진데도 당장 제 귀에 그리 속삭이며 비꼬는 것만 같다. 참자, 참아야 한다. 대놓고 말하는게 아니라면 꼬집어서 공격해봤자 피해망상이라며 역공당하기 십상이다.


 “풍성하고 화려한 드레스야말로 귀족다운 옷차림이지요. 공작부인의 드레스는 마치… 200년 전의 것 같네요.”

 ‘네 옷차림이 너무 구려서 과거에서 미래로 시간여행 한 사람인 줄 알았다.’


 “드레스가 너무 무거운 탓에 제가 입기엔 부담스럽답니다. 코르셋이 너무 헐렁해서 페티코트조차 걸치지 못하는 것이 슬프네요.”

 ‘살 찐 너나 필요하지, 내 몸을 봐라, 필요하겠니? 몸매감추기 용 풍성한 드레스가 좋긴 좋은모양이다.’


 속내를 드러내지 않고 상대의 심기를 벅벅 긁어대는 귀족식 대화. 주제를 모르는 평민출신 답지 않게 날선 반응으로 척척척 쳐내니 제법 당황스러운 모양이다. 백작부인의 눈빛이 파르르르 떨리던 말던 능청맞게 웃는 공작부인은 억지웃음에 뺨이 저릿저릿하다는 것을 꾹 참아본다.


 “어머나, 크리놀린마저 불가능하신건가요?”

 ‘어린애 체형으로 맞춘 크리놀린도 못걸치는 건 아니겠지?’


 “그건 공작님께서 싫어하신답니다. 부군께서 싫어하시는데 제가 어찌 입을까요.”

 ‘내 남편은 소아성애자 취향이 아니라서.’


 건방진 년. 백작부인은 차분히 부채질을 하며 열기를 식히려 애쓴다. 카플커프 공작을 핑계삼아 회피하려 애써봤자다. 말꼬리를 잡히는 순간 끝내주겠다는 악랄한 의욕이 대놓고 보인다. 잠깐 자리를 비운 하녀, 알리사는 새 찻잔들과 티세트를 들고 돌아온다.


 “커피와 시나몬 애플티를 가져왔습니다.”


 자연스러운 솜씨로 커피잔과 애플티를 내려놓은 알리사는 허리를 가볍게 숙이고 물러난다. 그래봐야 공작부인이 손을 들면 바로 나설 수 있는 거리일 뿐이다. 숨죽여 나누는 대화가 아니고서야 전부 들을 수 있는 거리에선 백작부인의 안하무인적인 말들이 전부 들려온다.


 “커피라니… 아직도 평민때의 습관을 버리지 못한 모양이네요. 괜찮으시다면 저희 저택의 티파티에 참여해주시겠나요? 좋은 차들을 준비해드리죠.”

 ‘입맛이 싸구려인 건 어쩔 수 없구나. 좋은 차가 뭔지 보여줄 테니 고개 좀 숙여보련?’


 “어머, 공작께서 좋아하시는 걸 따라마시다보니 저도 모르게.”

 ‘내 남편 입맛을 따라한건데… 너 설마 공작을 욕한거니?’


 “공작께서 그런 걸 좋아하실줄은 몰랐네요. 실례했어요, 공작부인.”


 그 이름높은 카플커프 공작이 커피를? 신혼임에도 불구하고 등장만 했다하면 뭇 여인들의 애간장을 녹이는 공작이다. 그가 즐기는 것 이라면 성별과 나이를 막론하고라도 경험해보려는 사람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종이담배로, 휴대성은 좋으나 맛과 향이 떨어져 평민들이나 피는 것 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시가에 비하면 맛, 향, 연기 어느 것 하나 좋지 않건만, 공작이 즐긴다는 이유로 유행을 탄 이래 여러 방식으로 가치를 높였다. 현재는 시가와 다를 바 없는 수준의 물건과 평민들이 쓰는 싸구려의 물건이 극과 극으로 극명히 나눠져있을 정도다. 물론, 공작은 비싸고 싸고 신경쓰지 않았다. 본인 입맛에 맞는걸 골랐을 뿐이다.


 커피… 그 서늘한 공작이 커피잔을 들고 음미하는 것을 상상하고 있자니 얼굴이 달아오른다. 백작부인은 노골적으로 흥분한 눈빛을 드러내며 부채질을 이어간다. 제 남편이나 친인척에게 공작의 새로운 취미생활에 대해 이야기해봄직 하다. 사업을 해도 좋고, 유행을 퍼트려도 좋으리라. 기를 죽이는데는 실패했으나 좋은 정보를 얻어낸 것 정도로 봐줄 수 있다.


 “그렇군요, 실ㄹ…….”


 “이쪽입니다.”


 의도치않게 말을 끊고 들어온 살롱의 고용인과 그 뒤를 따라 들어오는 여인의 자태에 모든 사람의 이목이 집중된다. 공작부인만큼은 아니지만 유행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보이는 드레스는 제국 외곽에서나 유행이 시작되었을 모양새다. 문제는 그것을 비웃기엔 상대가 너무나 아름답고 차분하다는 점이다.


 굽이치는 하얀 머리칼은 땅 위에 녹아 사라지는 파도만큼이나 덧없어보인다. 어깨와 가슴을 감싸 감추어낸 엠파이어드레스는 검소한 듯 절제되어있으나 여인의 가녀린 몸을 부각시켜보인다. 크리놀린과는 다르게 바닥을 쓸어내는 거대한 천들이 없으니 더더욱이나…


 “누구죠?”


 “다들 처음보시는 걸 보니 수도 출신은 아닌 듯 한데…”


 “아름답긴 하지만 그래봐야…”


 새로운 먹잇감에 속닥대기 바쁜 이들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다. 자리를 안내받은 여인은 차분히 앉은 채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맑은 햇빛이 마음에 드는지 은은한 미소를 드러내보인다. 살짝 보이는 옆모습에 여인들은 입을 닫는다. 열을 내 가며 건드려봐야 죽도밥도 아니게 될 법한 느낌이 다분하다.


 외형에서 느껴지는 나잇대를 보아하니 결혼 상대를 찾으러 온 모양이다. 아니면 정부가 될 요량일지 모르지. 아름다운 외모에 눈이 익숙해지자 질투가에 속이 뒤틀리는 모양이다. 저들끼리 속삭이던 여인들을 조용히 지켜보던 공작부인은 보란 듯이 자리에서 일어나 낯선 여인의 맞은편 자리에 앉는다.


 “초면에 실례좀 할게요.”


 “아뇨, 괜찮습니다.”


 세상에. 목소리마저 듣기 좋다. 약간 긴장했는지 기사와 같은 말투가 나와, 스스로도 당황했는지 눈 밑이 발갛게 달아오르는 것이 보인다. 공작부인은 난데없이 성장하는 친밀감에 작은 웃음을 토해낸다. 살롱이라는 장소만 아니면 이것저것 이야기해보고 싶어졌다.


 “저는 시얀 카플커프 폰 그림 이랍니다. 당신은…”


 “아인 아히야입니다. 카플커프 공작부인.”


 아히야? 아히야… 속닥이는 소리가 들리지만 자리에 앉은 두 사람은 신경쓰지 않는다. 공작부인은 남의 가문을 외우고 다닐 정도로 귀족가에 빠삭한 인물이 아니다. 쓸데없이 아는 척 하느니 평생 모르는게 낫지. 제 동갑또래로 보이는 아가씨가 동행하는 부인 없이 살롱을 방문한 것이 신기해서 이러는 것… 이 맞다. 솔직한 것이 잘못은 아니지 않는가.


 “영애로 보이는데… 부인은 함께 오지 않으신건가요?”


 “함께 자리하실 수 없는 상황이라, 혼자 외출했습니다.”


 그정도 질문이야 예상했다는 듯, 차분하게 대답하는 모습에 눈을 깜박인다. 자리할 수 없는 상황? 아무리 바빠도 자신의 딸이 살롱을 방문하는데 홀로 두는 어머니가 있나? 2년이 긴 시간은 아니지만 귀족들의 생리를 파악하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의아해하는 공작부인의 시선에 영애의 눈빛이 씁슬히 가라앉는다. 자신이 지내온 영지가 시골인 탓일 뿐, 모르는 사람의 잘못이 아니다.


 영애의 눈빛에 상황을 이해한 귀족여인들은 저들끼리 벌써부터 숙덕숙덕 떠들기 바쁘다.


 ‘아히야가(家) 라면 남서쪽의 국경 영주가 아닌가요? 마레아 호수가 있는 곳이었죠.’


 ‘부인이 출산 후에 병으로 죽었다던 그…’


 ‘태어난 아이도 어미를 닮아 병약하다던데, 소문에 비하면 건강해보이는군요.’


 ‘뭐, 미색은 부족하지 않네요.’


 ‘저런 한미한 가문의 여인이라면 얼굴이라도 받쳐줘야 하지 않겠어요?’


 다 들으라는 듯 떠들고 있으니 무시하려 해도 신경이 긁히기 마련이다. 제 3자인 공작부인이 듣기에도 신경이 벅벅 긁히는데 반해, 영애는 눈 하나 깜짝 않는다. 오히려 제 앞에 앉아있는 공작부인을 조용히 바라보며 대화가 이어가길 기다릴 뿐이다.


 “그럼, 오늘 하루만 저와 어울려주실 수 있을까요?”


 난데없는 호의. 싱긋이 웃어보이는 표정에 영애는 조용히 눈을 깜박인다. 방금 만났고, 통성명만 끝났을 뿐 아는 것 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사이에서 난데없이 ‘어울려달라’ 요청받으면 난색을 표할 수 밖에 없다. 공작부인은 당혹스러워하는 영애의 결정이 끝날 때 까지 말을 얹지 않는다.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나이 또래의 부인들은 까탈스럽고, 영애들은 예민하죠. 입이 가벼운 그들에 비해 당신은 그렇지 않을 것 같아서요.”


 대놓고 주변에서 숙덕이는 영애와 부인들에게 면박을 주는 공작부인의 말에, 주변에 있던 여인들의 입이 약속이나 한 듯 닫힌다. 그 대신이라도 되는 양 성난 시선이 공작부인을 향해 날아든다. 눈치빠른 하녀가 공작부인을 가리듯 다가와 귓가로 속삭인다.


 “살롱 마담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울려주시겠나요?”


 마다할 이유는 없다. 호의를 내미는 공작부인을 거절할 정도로 영애의 입지는 두텁지 않다. 적당히 이용당해 버려지는 편이 독자적인 행동보다 나을 정도로 미미한 입지다. 카플커프 공작가의 공작부인이라면 이렇다 할 세력을 세우지 않기로 유명한데다 일부러 적의를 드러내는 이가 아닌 정도는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다. 친해져서 나쁠 인물도 아니다.


 카플커프 공작과 아버지는 안면 또한 트여있는 사이다. 직속 하위의 귀족은 아니나, 기사의 훈련과 전쟁, 전투와 관련되어 여러 번 이야기를 나눴다던가. 갑작스러운 결혼만 없었다면 공작가에 혼담을 넣었으리라 이야기했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른다. 카플커프 공작은 무뚝뚝하지만 사내다운 자 이니, 가문과 딸을 맡겨도 상처입히진 않으리라… 했던가.


 사정이야 어찌되었든 공작은 결혼하여 공작부인을 곁에 두었고, 자신은 다른 혼처를 찾고있을 뿐이다. 영애는 눈을 천천히 깜박이며 공작부인을 마주본다. 아, 참으로 예쁜 금빛 눈이다. 허여멀겋게 색이 빠진 자신의 눈보다는 훨씬 더 진하고 사랑스럽다.


 “영광이에요, 공작부인.”


 제 승낙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밝게 웃으며 자리를 뜨는 공작부인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난다. 진한 검은빛의 부인과 새하얀 영애가 사라지니 살롱의 대기실이 심할정도로 칙칙하게 느껴지는 건 착각이 아니리라. 잠깐 저들끼리 시선을 주고받던 여인들은 이상할정도로 솟아오르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힌다.


 왜 자신들의 옷이 한심해보이는지, 화려하게 꾸민 외모가 거무죽죽 해보이는지 알 수 없다. 몇몇은 짜증스레 살롱을 박차고 나갔고 남은 몇몇은 더 괜찮아보이는 드레스와 장신구를 찾으려다 허탕만 치고 말았다.


'novel' 카테고리의 다른 글

[SCRAP] LADY ENRICA  (0) 2019.02.26
[DREAM AU] Privatter 01-08  (0) 2019.01.03
[VER NIX] 02. APPARATIO  (0) 2018.11.18
[VER NIX] 01. VARGUS  (0) 2018.10.23
[ECHOFELL] 02. HALLCINATION  (0) 2018.09.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