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DY ENRICA
INFO
단편소설, 작업 중 드랍.
레이디 엔리카는 영주의 딸이다.
국경지와 수도의 중간길목에 자리한 자그마한 영지는 소도시로서의 구색과 기능은 모두 갖추고 있는 편이다.
수도나 대도시에 비하면 화려함이나 세분화가 부족할진 모르나, 성채 안의 도시를 제외하면 죄 시골과 숲, 넓은 들판과 산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작은 도시라도 영주는 영주. 자신이 다스리는 합법적인 영지 안에서는 왕처럼 군림한다.
그런 영주가 분노를 참기 위해 긴장을 하거나 식은 땀을 흘릴 일이 얼마나 있을까.
해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영지전의 협력요청서? 평생 한 번 있을까 말까한 황실의 친서? 영주로서도 상대하기 어려운 대귀족의 연락이나 방문?
아, 차라리 그런 것 들이라면 좋았을 것을.
“지금 그게 무슨 소리인지 알고는 있는거요?”
“뭐, 그리 큰 문제라고.”
눈 앞에서 거들먹거리는 사내놈을 보고있자니 울화가 치민다. 저 새파랗게 어린놈이 불쑥 찾아들어온 것 만으로도 기분이 영 좋지 않았건만, 혹시 몰라 대화를 받아들인 자신이 머저리였다.
성질같아선 어디 한 군데 주먹으로 후려쳤으면 좋곘다.
“다른 남자도 아니고, 용병왕이나 되는 남자가 연애신청을 하는건데 그렇게 얼굴이 썩어야겠습니까?”
용병왕? 용병와앙??
저 체신머리없는 호칭부터 정정해야하는지, 연애신청이라는 말부터 정정해야하는지 모르겠다. 둘 다 동시에 정정하기엔 기력이 부족하다.
잠깐 제 뒷목을 주무른 영주는 끓어오르는 혈압을 간신히 낮추고서야 입을 열었다.
“지금 이 사실을 내 딸아이도 알고있는거요?”
“물론, 레이디 엔리카 모르게 이런 짓을 했다가 무슨 일을 당할진 제가 더 잘 압니다.”
하하하. 너스레에 가까운 웃음을 토해내며 무해함을 어필하는 ‘자칭 용병왕’을 사납게 노려본 영주는 제 앞에 내려져있는 용병패를 지그시 내려본다.
금색도, 은색도 아닌 오묘한 빛을 자랑하는 백색의 금속은 미스릴밖에 없다. 미스릴, 백색 용병패를 가진 용병은 용병왕이 맞긴 하나, 이걸 순순히 믿을 멍청이가 어디있겠는가.
“집사. 기름 섞은 흙탕물과 촛불을 가져오게.”
“예.”
주인과 함께 눈을 부라리던 집사는 허리를 깊이 숙이고서 물러난다.
기름 섞은 흙탕물과 촛불. 흔한 재료이기는 하나 미스릴을 구분짓는 능력을 확인하기엔 더할나위없이 좋은 물건이다.
신의 금속이 오리하르콘이라면 미스릴은 천사의 금속. 정화와 방화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물건이다. 어찌나 성스럽게 취급되는지 신전에서조차 떠받드는 물건이다.
평생토록 구경조차 못해볼 금속이 눈 앞에 있건만. 감격과 환희보다는 침잠하는 기분이 영 좋지만은 못하다.
“데릴사위가 되겠다는 것도 아니고, 잠깐 연애하며 만나보겠다는 것도 이리 어려워서야.”
벌써 허락이 떨어진 것 마냥 으스대는 태도에 가라앉혀놨던 혈압이 다시금 불쑥 솟아오른다. 저런 자식을 키운 부모가 어떤 인간들인지, 얼굴 한 번 마주해보고 싶은 심정이다.
“내 딸은 평민이 아니라 귀족이오. 미래에는 이 영지의 안주인이 될 아이인데 몸을 함부로 해야 되겠…….”
“와, 그 구닥다리 같은 소리는 수도 뒷방늙은이 한테서도 들은 적 없는데.”
“이 시정잡배 같은 놈이!”
성질이 폭발할 것 같은 목소리. 동방의 야차라는 괴물이 저런 얼굴일까. 성난 오우거보다도 더 사나워보이는 얼굴과 기백은 적당히 교육받고 성장하여 세습으로 영주가 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평민 용병으로 제법 굴러먹은 것 같달까.
“아이고, 아버님. 진정하시고.”
실실 웃으며 진정하라는 놈 치고는 너무 유들유들하다. 재수가 없어도 너무 없어서 없던 정마저도 싸그리 긁어서 삭제시켜버리는 느낌이다.
“네놈이 용병왕이고 뭐고……!”
“야! 엔비스 이 재수없는 새끼야!”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집무실의 문을 걷어차고 들어온 이의 사나운 목소리에 혈압이 터질 것 같던 분위기가 싹 날아가버린다.
영주가 가장 아끼는 유창목으로 만든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낸 영애.
레이디 엔리카는 제 특유의 동글동글한 눈을 최대한 부릅뜬 채 눈앞의 청년에게 성큼성큼 다가간다.
짐승보다 더한 우악스러운 손길로 반짝반짝 빛나는 적발을 사납게 휘어잡아 당겨질 때 까지도 움직이지 못하던 자칭 용병왕, 엔비스는 끄악! 하는 비명을 토해내고 만다.
“너 이 미친새끼! 죽어! 죽어!! 죽지 않을거면 네 머리통에 뗌방이라도 만들어야 속이 후련해! 야이 잡배가 기르는 새끼 개 자식아!”
“악! 끄아악!! 리카! 리카! 머리뜯어져! 머리!”
“뜯어져! 뜯어지라고 하는거야! 알아? 아냐고!”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치솟던 혈압마저 가라앉은 영주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제 딸을 바라본다.
평생 사납기는커녕, 언제나 유순하고 말 잘듣고 똑똑하던 딸이었다. 미색이 조금 부족할 뿐이지 어딜 대어도 부족함이 없는 것이 제 아내와 닮아서 너무나 예쁜 딸이…….
“네스토레 영애. 진정하십시오, 영주님께서 보고계십니다.”
“에지오는 말리지 말아요! 길드마스터가 대머리어도 상관없다고 말한 거, 아직 기억하고 있으니까!”
“안돼! 내 머리는 안돼! 지오! 살려줘! 리카좀 떨어트려줘!!”
뚜둑 소리와 함께 머리카락 몇가닥이 정말로 뜯어지자 엔비스의 비명소리가 더 커진다. 그 소리를 들은 하인들이 우르르 몰려와 이 광경을 구경하기까지 한다.
“엔리카! 그만! 그만 멈추거라!”
상황을 타개한 것은 당황속에서 다급히 벗어난 영주였다.
제 금지옥엽 딸이 시정잡배 같은 놈의 머리를 쥐어뜯는 험한 꼴을 하인들에게 구경시킬 바에야 멈추게 하는 것이 낫다.
제 아버지의 만류까지는 떨쳐내기 어려운지 잠깐동안 고민하던 엔리카는 깊은 숨을 내쉬며 손을 거둔다. 그럼에도 그 예쁜 갈색눈에는 살의가 깃들어있어, 용병왕이라는 엔비스마저 딸꾹질을 하게 만든다.
‘너, 조금 있다가 죽었어.’
‘망했다.’
아버지의 눈에서는 보이지 않는 각도로 입을 달싹인 엔리카의 경고에 엔비스의 안색은 파리하게 젖어들어간다.
에지오를 이용하면 절대로 들키지 않을거라 생각했건만, 오히려 생각 이상으로 빨리 와버린 탓에 계획이 망해버렸다. 허락을 받기도 전에 들이닥칠게 뭐란 말인가.
영주는 딸이 잠깐 진정하는 틈을 타 하인들을 물리고 집사와 하녀장을 불러 주변을 정리시킨다. 하녀장이 나서서 하인들의 입단속을 단단히 시킬터다.
“죄송해요, 아버지. 이러려던게 아니었는데…….”
“대체 무슨 일이냐, 내 딸아. 응? 저 잡배놈의 말이 사실이냐?”
“네?”
무슨 말?
아버지의 눈을 마주할 수 없어, 가볍게 숙이고 있던 고개는 바로 엔비스를 흉흉하게 돌아본다.
귀족영애라며. 영주의 딸이라며. 험한 일 한 번 한 적 없는 아가씨가 어찌 저렇게 사납고 무서운 눈을 뜰 수 있는지 당췌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네가 요즘들어 늦게 들어오는 것이 저 놈과의 밀, 회… 때문이라는 말을 들었…….”
“엔! 비! 스!”
“네스토레 영애, 안됩니다.”
눈치 빠른 에지오가 엔리카의 앞을 막아선다. 곰처럼 커다란 몸으로 막아서니 뺀질거리는 엔비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금세 화가 가라앉는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엔리카는 아주 천천히 숨을 내뱉는다.
“아니에요. 절대, 맹세코, 무슨 일이 있어도 아니에요, 아버지.”
“그러면 저자와 밀회도 없었고, 사랑의 뭐시기도 없었다는게냐?”
엔리카는 망설임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해사하고 무해한 미소를 피워올렸다. 우아하면서도 나긋한 미소는 ‘아무데나 돌아다니며 사고칠’ 것 같은 모습이 아니다.
“엔리카 디 클로에 데 네스토레의 이름을 걸 수 있어요. 엔비스 코라이와는 아무 관계도 아니에요.”
“리카! 아무 관계도 아닌 건…….”
“입 다물어.”
단칼에 엔비스의 말을 잘라낸 엔리카는 현기증이 도는지 몸이 비틀거린다. 그 모습을 귀신같이 눈치 챈 영주와 에지오가 손을 뻗어 힘빠진 몸을 받쳐준다.
“일단 앉거라.”
소파에 비스듬히 앉혀진 엔리카는 마주앉은 자리에서 산발이 된 머리를 정리하지도 못한 채 눈치를 보는 엔비스를 죽일 듯이 노려본다.
에지오는 엔비스의, 영주는 엔리카의 옆에 앉아 분위기를 가다듬는다. 조용히 뒤에서 지켜보던 집사는 뒤늦게 기름 섞은 흙탕물과 양초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다.
그냥 보았음에도 뭘 위해서 준비된 것인지 아는 눈치다.
영주는 말 없이 흙탕물에 용병패를 담궜다 꺼내자마자 불에 그슬린다. 언제 열려져 있었는지, 열린 창문으로 기름이 타는 매캐한 공기가 빠져나간다.
패를 꼼꼼히 그슬린 영주는 집사에게 손수건을 받아 가볍게 닦아낸다.
아무리 깔끔한 기름이더라도 검뎅이 남을만 하건만, 수건도 패도 언제 더러운 것에 닿았냐는 양 깨끗하기 그지없다.
“용병패가 가짜는 아니었군.”
탁, 내려놓는 손길엔 짜증이 묻어있다. 가짜였다면 당장 치도곤을 내어 영지에서 영구히 추방했을텐데.
“영주님과 네스토레 영애께 실례를 저지르게 되어 송구합니다.”
엔비스의 뒷머리를 붙잡아 함께 고개를 숙인 에지오의 사죄를 보는 반응은 극명하리만치 단호하다. 당연하게도 화가 누그러지지 않아 눈에 날이 선 영주와 집사 그리고 엔비스만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엔리카.
“이쪽은 용병길드 아단(Adan)의 마스터인 엔비스 코라이. 저는 그 보좌인 에지오 세베르입니다.”
“아단 길드의 이름은 시궁창 쥐들도 알지. 치안을 어지럽히지 않는 제법 괜찮은 용병무리로 유명하다 들었다만…….”
“면몫이 없습니다.”
용병, 상인, 의사, 학자와 같은 수 많은 직업들은 조합이 있으며 그 조합에서 어느정도 인지도와 지위가 있어야 각자만의 길드들 세울 수 있다.
개중에서 가장 수가 많은 것은 아무래도 용병이다. 돈만 주면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시선을 증명하듯 치안을 어지럽히고 사건사고를 많이 일으키나, 유사시에는 병력으로 쓸 수 있는 존재들.
영지 네스토레는 자력으로 병사들을 길러낼 수 있기에 덜한 편이나, 이보다 더 작은 도시와 영지는 병력을 쌓기 어려운 경우가 많기에 용병들이 싫더라도 바로 쫓아내기 어려운 상황이 잦다.
거기다 쫓겨난 용병들이 악의를 품고 도시와 마을을 습격을 하거나 약탈을 하는 일이 보기 어려운 것도 아니다.
다만 이곳저곳에서 악명을 떨칠 경우 용병으로서 살기 어려워지는데다 용병조합에서 현상금을 걸기까지 하니 서로 쉬쉬하며 넘어가는 경우가 많다.
길드 아단은 그러한 용병들 중에서도 가장 예의있고 성실하며 문제가 없기로 유명했는데……
용병을 믿는 사람이 멍청이었다.
“저희 마스터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나, 대부분이 거짓말일겁니다.”
“지오, 나를 거짓말쟁이로 만들 셈은 아니겠지.”
“길드가 네스토레의 영지에 영영 발을 못 딛는 것 보단 낫습니다.”
끙, 소리를 내며 뒷머리를 긁적이던 엔비스는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자그마한 뗌빵에 입을 꾹 다문다.
‘리카! 대머리를 만들겠다더니 진짜로 만들 생각이었냐!’
머리카락을 다 뜯어버리겠다고 날뛸 때 막았어야 했는데. 기세가 너무 흉흉한 나머지 도망가면 안될 것 같아서 받아준게 문제였다.
이 예쁜 붉은 머리에 뜯을 데가 어디있다고!
잡히고도 벗어나려면 충분히 벗어날 수 있었다. 다만 제 힘이 세다보니 엔리카가 다칠 수도 있고, 다치지 않게 하려니 놀라는게 신경쓰였다. 어느쪽이든 변명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이 참으로 애석할 따름이다.
엔비스가 다른 생각을 하는 아주 잠깐 사이에 에지오와 영주가 제법 이야기를 나눴는지 분위기가 제법 나쁘지 않다.
“오해가 풀린 것 같아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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