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1. 18. 23:40

02. 준비


INFO

 실제 사건, 인물, 단체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트리거 워닝 요소가 있습니다. (살인, 강간, 성행위, 심한욕설, 19금 등)



 아야야, 아파파, 잠깐만, 잠깐... 으악! 하는 소리들이 작은 방 안을 쩌렁쩌렁 울린다. 러셀은 엄살을 부리는 제 동생들을 한심하다는 듯 내려본다. 침대에 널브러져 이곳 저곳 연고를 발라주고 있자니 지독한 연고냄새에 머리가 울린다.


 창문을 열자니 두 동생들이 춥다고 징징대고 창문을 닫자니 연고냄새가 참을 수 없이 고약하다. 창문을 적당히만 열어놓은 러셀은 멍청할 정도로 얻어맞기만 한 제 동생들을 내려본다. 성기빼고는 다 얻어맞았다고 해도 될 정도로 너덜너덜하다.


 "으으, 진짜 가차없네..."


 "뼈 부러지는 줄 알았어."


 투덜거리는 두 녀석들의 반응에 한숨이 멈추질 않는다. 게거품을 물고 기절한 두 녀석을 옆구리에 한 명씩 끼고 돌아온 준의 모습에 질겁하며 걱정했던 3시간이 쓸데없었다.


 아버지인 유어트의 도움으로 둘을 방에 옮겨 치료사를 불렀으나 단순 타박만 있을 뿐이라는 진단을 받았을 뿐이다. 전신이 멍이니, 쓸데없는 짓 말고 두 주간은 방안에서 치료만 집중할 것. 준의 손속이 얼마나 계획적인지 간접적으로 경험한 러셀은 묘한 오한에 몸을 떨어야만 했다.


 "형, 형은 그 아가씨 봤어?"


 "형은 봤지? 어땠어? 정말로 예뻤어?"


 "응. 보긴 봤는데... 뭐, 평범하시던데."


 유어트의 조언대로 러셀은 별 것 아닌 듯 대답한다. 괜한 기대만 심어줬다가 덜떨어진 사고를 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거짓말을 해야한다니, 혈기가 넘쳐 사고를 치더라도 거짓말 만큼은 하지 않으려 노력한 러셀의 양심이 아파온다.


 이것이 전부 아가씨를 이 멍청이들에게서 지키기 위함이다. 생각을 곱씹으며 러셀은 늘어져있는 밀러드의 등에 약을 부어 문지른다. 으악! 악! 천천히, 형! 아파! 하며 불평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귓등으로 듣고 넘긴다. 이놈들의 엄살을 받아주다간 하루가 모자라다.


 연고를 다 발라준 러셀은 장갑을 벗어 물수건이 담긴 통 안으로 던져넣는다. 고약한 냄새가 가득한 방에서 빨리 도망가고 싶은 마음 뿐이다. 제 형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동생들은 입을 비죽인다.


 아버지는 우리 아가씨가 그 누구보다 예쁘다고 이야기 해 줬는데, 다 거짓말이었나? 하며 투덜거리기 바쁘다. 유어트가 들었다면 두 사람의 머리에 혹이 하나씩 추가될 소리지만 다행이도 그들의 아버지는 아가씨를 보필하느라 자리에 있지 않다.


 "난 아버지를 도우러 가야하니까, 또 쓸데없이 싸우거나 사고치지 말고 얌전히 누워있어."


 "예, 예."


 "어차피 이렇게 멍들어선 어디 가고싶어도 못가."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러셀은 바람빠지는 한숨을 뱉고선 물통을 들고 나간다. 저녁시간이 지나버렸으니 주방장에게 슬쩍 부탁해, 남은 스프나 빵을 받아볼 생각이다. 넉살 좋은 프랭크 아저씨라면 적당한 잔소리와 함께 저녁거리를 챙겨주겠지.


 연고냄새가 가득한 몸으로 아가씨를 뵈러 가거나 주방으로 갈 순 없다. 빨랫감을 맡길 겸 씻으러 가 볼까... 동생들 탓에 조금 무거웠던 러셀의 발걸음이 저택 본관을 향하니 아까보다 배는 가벼워지는 기분이다.


 러셀이 떠난 방은 창문이 열려있어 약간 서늘하고 지독한 연고냄새에 코가 절여질 지경이다. 러스와 밀러드는 각자의 침대에 널브러져, 멍든 몸을 이리저리 뒤척인다. 아플 땐 잠드는 것이 최고이건만 온 몸이 욱신거리니 잠 마저 달아나버린다.


 간간히 으으, 아아아, 같은 죽어가는 신음 말고는 대화조차 오가지 않는다. 뒤척임을 참아보려던 러스는 결국 통증을 참아가며 몸을 이르킨다. 끄아아아아... 하는 소리가 있었지만 밀러드는 짜증 한 번 없이 그 모습을 올려본다.


 "야, 밀러드."


 "왜."


 "아가씨 보러 가자."


 "이꼴로?"


 "멀리서 몰래 보면 되지."


 난데없는 제 형의 제안에 밀러드는 뒹굴던 몸을 느리게 이르킨다. 손바닥과 발바닥에 멍이 들지 않음이 천만다행일 지경이다. 겨우겨우 자세를 잡은 밀러드는 호기심 가득한 제 형을 빤히 바라본다. 러셀은 기본적으로 말리면 하지 않는 인물이지만 러스는 그럴 인물이 아니다.


 말려도 한다. 안 말려도 한다. 동조하면 더 한다.


 문제는 밀러드가 러셀보다 러스와 오래 붙어 놀다보니 성향이 닮아버렸다. 가만히 있기엔 잠도 오지 않는데다 배고프고 심심하니 멍든 몸이라도 근질근질하게 느껴진다.


 "어떻게 보려고?"


 "아버지께서 준비하셨던 아가씨 방, 거기가 훤히 보이는 나무 알지?"


 "거기서 보다가 들키면 진짜로 죽을텐데."


 오늘 우리를 먼지나게 패던 준이라는 기사 눈빛, 기억 안나? 하는 밀러드의 질문에 러스는 입을 삐뚜름하게 움직인다. 수도의 저택에는 기사라고 할 만한 인물이 없다. 애초에 마레아 영지는 국경지다.


 매주 전투가 일어나는 분쟁지역인데다 병사와 기사들이 우후죽순으로 죽어나가는 땅에서 수도로 기사를 보낼 여력따윈 없다. 아히야 영애의 수도행을 호위하는 이가 준 한명인 것만 봐도 기사의 수가 압도적으로 부족한 것이 훤히 보인다.


 "안들켜. 우리가 거길 몇 번이나 올라갔는지 너도 알잖아."


 "슬쩍 보고만 돌아오자 그거야?"


 달이 뜨고 주변이 컴컴하니 거대한 나무에 올라탔다고 해서 바로 들킬 리 없다. 러셀의 말대로 평범한 아가씨라면 잠깐 구경하는 것 만으로도 질리겠지. 러스가 외투를 주섬주섬 챙겨입자 밀러드도 알아서 외투를 챙겨입기 시작한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집사로서의 경력과 눈이 있는 아버지가 칭찬하던 아가씨다. 궁금하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옷을 단단히 여민 두 청년은 어두운 복도가 훤히 보인다는 듯 몸을 움직인다. 복도를 빠져나가 정원 뒷길로 발길을 옮긴다.


 정원 뒷길의 끝에 이어진 가파른 언덕, 잎이 나지 않는 여섯 그루의 나무를 지나면 거대한 플라타너스 나무 한 그루가 있다. 아주 어릴 때 부터 오르내리는데 익숙해진 탓일까, 눈을 감고도 오를 수 있을 정도로 익숙한 나무를 올려보던 러스는 손의 땀을 툭툭 털어낸다.


 목적을 가지고 올라가려니 생각보다 긴장되는 탓일까. 잠깐 심호흡을 하던 러스의 손이 나무를 단단히 붙잡고 기어오른다. 웬 원숭이가 부럽지 않은 움직임을 지켜보던 밀러드는 혹시 몰라 주변을 슬쩍 돌아본다.


 '없겠지?'


 자신과 러스를 후드려 팬 준이 이 나무를 알고 있을 린 없겠지. 잠깐 심호흡을 한 밀러드는 제 형이 올랐던 나무를 성큼성큼 기어오르기 시작한다. 멍으로 엉망인 신체가 비명을 지르긴 하지만 평소에도 둘이서 대련하다가 잘못 얻어맞아 멍을 달고살던 두 사람이다.


 러셀 앞에서야 엄살을 좀 부렸지만 맷집이 생긴 탓에 움직이는 것 정도야 아무렇지도 않다. 높게 뻗은 튼튼한 가지를 몇 번 당겨보던 밀러드는 제 형의 옆자리에 대충 몸을 숨긴다.


 평소라면 '왔냐?' 라며 장난부터 걸어야 할 러스가 조용하다. 밀러드는 제 형의 어깨를 두드리려다 그의 손이 방이 훤히 보이는 테라스를 향해있음을 눈치챈다. 뭐가 보이길래 넋이 나가서 손으로 가리키기까지 하냐. 시큰둥한 눈빛으로 러스가 가리키는 방향을 돌아본다.


 주변 경계가 되어있지 않은 탓일까, 테라스 창문은 커튼에 가려지지 않은 채 방 안을 훤히 드러나게 만든다. 아가씨의 방은 어둠속에서도 훤할 만큼 밝다. 대리집사인 유어트는 평소 검소한 생활을 좋아하기에 밤에도 이렇게 밝은 날은 드물다.


 그 밝은 방 안에서 있는 이는 '유모'라는 중년 여인과 새하얀 머리카락을 흐트러트린 채 웃고 있는...


 "......."


 평범하다고? 저게? 러셀 형은 눈이 삐었음이 분명하다. 밀러드와 러스는 입을 떡 벌린 채 방 안의 여인에게 시선을 빼앗겨버렸다. 하얗게 굽이치는 긴 머리카락과 방안의 빛을 모두 받아내는 투명한 피부, 뒷모습임에도 불구하고 눈 안으로 박혀들어오는 여체는 시선을 뗄 수 없다.


 살짝 돌아선 옆모습을 통해 여리기 짝이없는 몸의 굴곡이 보인다. 혈기 가득한 두 청년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며 눈을 빛낸다. 저렇게 아름다운 여자는 평생 두고두고 처음이다.


 자신들의 아버지인 유어트가 돌아가신 남작부인이 얼마나 아리따운 분이셨는지 설명하셨을때가 떠오른다. 희게 굽이치는, 바다의 베일같은 하얀 머리카락이 바람에 살랑이면 모든 사내들이 마음을 졸였다 했다. 투명한 피부는 병약하고 차가웠으나 그마저도 빛이 났다 했다.


 겨울 눈이 녹는, 봄같이 따스하게 미소지으실 때마다 사내와 여인을 막론하고 남작부인의 마음을 가지고싶어 안달 난 사람들이 가득하다 했다. 어릴 적에는 동경했고 자라면서는 비웃거나 일축했다. 그런 사람따위는 없다며 놀리기까지 했다.


 지금에 와서는 아가씨와 남작부인을 비웃었던 자신들을 후드려 패고 싶은 심정이다. 아가씨는 아버지의 설명보다 몇 배는 더 아름다웠다. 저 멀리서 훔쳐보고 있을 뿐임에도 사랑에 빠진 양, 가슴이 쥐어짜이는 감각에 헐떡이게 된다.


 당장에라도 아가씨께 뛰어들어가 사모한다고 외치고 싶을 지경이다. 러스와 밀러드는 저도 모르게 서로를 돌아본다. 얻어맞거나 수치를 느껴 시뻘겋게 달아오른 것과는 다르게 환희와 열기로 달아오른 얼굴빛들은 비웃기조차 민망하기 짝이없다.


 "봤어?"


 "어."


 혈기 가득한 질문에 열기 가득한 대답이 붙는다. 두 청년은 입을 꾹 닫고서 나무를 내려간다. 큰일났다. 진짜로 큰일났어. 이게 큰 일이 아니면 뭐가 큰일이란 말인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두 청년이 서둘러 정원의 뒷편으로 뛰어나오자 기다렸다는 듯 진검을 든 준이 서있다.


 달빛이 없어, 죽은 사람의 눈마냥 생기 한점 없어보이는 시선에 둘은 입을 꾹 닫는다. 큰일이 난 건 자신들의 마음이 아니라 목숨인 모양이다. 식은 땀과 마른 침을 삼킨 두 청년이 뒤로 물러나자 준의 고개가 움직인다.


 "내 경고가 가볍게 느껴졌던가?"


 "그... 그게... 그, 어..."


 "쓸데없는 짓을 못하게 해줘야겠군. 그렇지?"


 다정한 듯 하면서도 냉랭하기 짝이 없는 준의 질문에 둘은 마른 침을 넘기며 허허, 하하 웃어보인다. 살려주세요, 하며 빌어봤자 무시당할 것이 뻔해 웃을 뿐인데 오히려 준의 심기를 거스른 것 처럼 느껴지는 것은 착각...이 아니다.


 달은 구름에 가려졌음에도 준의 검은 서슬퍼렇게 빛나보인다. 까닥 잘못하면 저 검에 베이겠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히 멀어진다. 진짜로 죽이겠어? 하던 가벼운 생각은 주인을 두고 하늘 저 멀리 도망가버렸다. 왜 저만 도망가는지 원!


 준은 진검을 빼어들었음에도 진심으로 벨 생각은 없다. 아가씨가 당부한 일 이기도 했으나 진검은 어디까지나 멍청한 형제들에게 겁을 줄 요량으로 꺼내든 것일 뿐이다. 혹시 몰라 러셀을 포함한 저택의 사용인들에게 러스와 밀러드에 대해 물어보길 잘했다.


 그러한 준의 상냥한 셈을 알 리 없는 러스와 밀러드는 못 먹을 것을 입에 넣은 사람마냥 얼굴빛이 거무죽죽하다. 흉흉하게 빛나는 진검과 그것을 으스러져라 쥐고있는 ‘정식 기사’의 살기는 진심이 아니라해도 숨을 콱 죄게 만드는 힘이 있다.


 저 멀리, 짐승이 우는 듯한 비명소리에 네글리제를 걸치던 아가씨는 얇은 속눈썹을 깜박인다. 혹여 추울까, 얇은 로브를 걸쳐주려던 유모는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는 제 아가씨의 모습에 눈을 크게 꿈벅인다.


 “아가씨, 왜그러셔유? 뭔 일 있어유?”


 “무슨… 비명소리같은게 들려서요.”


 비명소리? 로브를 든 유모는 환기를 위해 활짝 열어뒀던 창가로 향한다. 암만 귀를 기울여도 비명소리는커녕 지나가는 개짖는 소리도 들리질 않는다. 기껏해야 바람소리겠거니, 창문을 닫고 커튼을 펼쳐낼 뿐이다.


 “유어트 집사네 아들들이 근육통에 짜는 소리가 아닐까유? 거, 그… 아들이 엄살이 심하다 카더구만유.”


 아니면 바람소리겠지유, 별 것 아닐거라며 너스레를 떠는 모습에 잠깐 눈을 깜박이던 영애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겠구나, 그럴 수도 있겠네. 하며 수긍하는 것이 익숙해보인다. 한 두 번도 아니고, 신입기사들이 생길 때 마다 간간히 들었던 소리들이지 않은가.


 얌전히 로브를 걸친 아가씨는 옷자락에 묻힌 머리카락을 걷어낸다. 리본을 꺼낸 유모는 머리카락 한 가닥까지 꼼꼼히 모아, 흐트러지지 않도록 한데 묶어준다. 제 손으로는 몇 번을 묶어도 흘러내리는 방법이건만 유모의 손만 닿으면 풀이라도 붙인 양 딱 묶여버린다.


 “올해는 유독 더 춥다 허구먼유. 아가씨는 괜찮으신지 모르겠어유.”


 “아직은 괜찮아요, 유모.”


 부드럽게 웃어보이는 아가씨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건 잘못된 일이 아니다. 아가씨는 매년 이맘때, 첫눈이 내릴 시기가 되면 크게 앓는다. 잦은 호흡곤란과 고열, 몸살, 오한… 심할 때는 발작까지 했다. 성인식을 치룬 이후, 최근 5년간은 발작을 하지 않아 한 숨 덜었으나 사람 일은 어찌될지 모르는 법이다.


 “아프시면 꼭 말씀하시어유! 전처럼 숨기면 클나니께!”


 전처럼… 이라고 해도 열 네 살 때의 일이었다. 10년이나 되가는 옛 이야기를 꺼낼 건 뭐람. 얌전하기만 한 아가씨 답지 않게 살짝 새초롬한 표정을 지어보인다. 그마저도 어울리기보단 남을 따라하는 양 어색하기 짝이없기에 유모는 눈치조차 보지 않는다.


 ‘아이고, 아가씨가 너무 편하게 해주셔서 말실수를 했네유.’ 라며 변명을 뱉기는커녕 당당하게 로브의 허리끈을 여며주고는 제 딸을 바라보듯 따스히 눈을 빛낼 뿐이다. 아가씨는 그러한 제 유모를 향해 평소처럼 부드럽게 웃을 뿐이다. 유모를 말 싸움으로 이길 리 없지.


 창문을 닫으니 서늘했던 밤공기가 금세 가시는 느낌이다. 곧 겨울이라지만 아직은 겨울이라기엔 부족하다. 추운 듯 춥지 않은 날씨. 매년마다 병으로 괴로웠을 시기이니 싫어할만 하건만, 아가씨는 이런 날씨를 가장 좋아한다. 어찌하여 그렇느냐 물으면 타고나기를 그러하다 할 뿐이다.


 유모는 뒷정리를 끝내고 방을 비웠다. 본래 사용인이란 필요할 때만 곁을 지키면 되는 존재들이다. 아가씨는 그러한 사실을 못내 불편하고 아쉽게 느끼는 모양이지만 사실이 그러한 것을 어찌하겠는가. 홀로 남은 아가씨는 차분한 발걸음으로 제 침대에 걸터앉는다. 재대로 와 본 기억이 없으니 제 방이라 해도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어찌할 수 없다.


 아무리 많아도 2, 3년 내에 남편감을 찾아야한다. 본래 성정이라면 병자의 수발을 드는 불행한 사내를 만들고 싶지 않기에 홀로 살다 죽었을 터다. 그러한 선택이 존중받지 못하는 이유는 성별이나 나이, 출신이 아닌 ‘건강’ 때문이다.


 제국은 남녀의 진출에 구분을 두지 않는다. 실력과 지식, 배포만 있다면 출신조차 따지지 않는다. 뼛속까지 귀족인 자들은 제법 불만이 크겠지만 실력으로 자리를 만든 ‘관료’들은 오히려 귀족보다 더 귀족적인 면모를 보이기까지 한다. 그것의 가장 가까운 예가 선제와 그의 황후라 할 수 있다.


 정부의 자식을 포함한 열 셋의 아들과 스물 일곱의 딸 중 열 넷째 딸이었던 당시의 황제는 ‘내가 원치 않는 사내에게 시집가고싶지 않다.’는 이유로 검을 잡고 반기를 들었다. 자신에게 맞서는 오라비들과 누이들을 모두 죽이고 황제 자리에 앉았다. 황후는 황제의 난을 도운 최측근으로, 타국의 노예출신이었다. 아무리 성별과 출신에 관대한 제국이라 할지라도, 당시에는 모든 귀족들이 반기를 들 정도로 파격적인 행보임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심할정도로 독보적인 사건들은 수 많은 귀족과 관료들의 억상을 끌어내게 되었다. 저들끼리 수군대면 그만일텐데 굳이 입밖으로 뱉어 선제를 귀찮게 만들었다 한다. 그때 선제는 ‘건강하기만 하면 됬지 뭘 또 바라느냐. 왜, 독신으로 살다 죽을까?’ 하며 진심으로 독신이 될까 물었었다는 기록마저 있다.


 문제는 이 기록과 발언이 이후에 큰 걸림돌이 되었다. 사내와 여인, 귀족과 평민을 가르는 보이지 않는 선이 건강한자와 그렇지 아니한 자로 나뉘는 시발점이 되어버렸다. 분명 다른 조건으로는 멀쩡한 이가, 건강상으로 조금 불편하다는 이유에서 제 본래의 자리에서 쫓겨나는 일이 빈번하게 일어났다.


 여인이라도 검을 쥐지 못해도 영주가 되고 가주가 될 수 있다. 제국은 당연하게 가능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아가씨는 타고난 건강이 좋지 않은 탓에 영주도, 가주도 될 수 없다. 자리를 이으려면 건강한 이를 반려로 들여야만 한다. 들이지 못할 경우, 당장이라면 아히야 남작이 있어 괜찮다. 다만 남작이 자리할 수 없을 경우 대리인이 되어줄 건강한 인물이 있어야만한다. 있지 않으면 재산과 지위를 제외한 모든 것을 빼앗기게 된다.


 멀쩡히 살아있어도, 무언가를 할 수 있어도. 건강, 건강… 중요하긴 하지만 그깟게 뭐길래. 건강하더라도 단명할 자는 단명하고 병약하더라도 장수할 자는 장수한다. 대체적으로 건강한 자가 장수하는 것은 부정할 수 없으나 억울함은 쉬이 가실 길이 없다.


 ‘이미 체념한 일을…’


 하, 자조적으로 웃은 아가씨는 침대에 몸을 뉘인다. 너무 깊이, 너무 불쾌하게 생각했더니 기분이 영 좋지 못하다. 가라앉혀야지. 진정해야지. 감정이 격해지면 제 몸만 아프다. 영애는 그 사실을 무서울 정도로 잘 알고 있다. 심하게 긴장한 자리에서 쓰러지는 일이 흔한 탓에 사교계에도 얼굴을 내밀지 못하지 않았는가. 겨우겨우 발을 들인건 성인식이 있던 다음 해, 데뷔탕트 마지막날이 처음이자 끝이었다.


 몸이 무거워, 머리가 어지러워. 열이 오르는 착각에 몸을 뒤척인다. 이러다간 내일당장 몸살에 크게 앓겠는걸. 듣는 이도 없는 주제에 혼자 중얼거린 영애는 겨울이불 못지않게 두툼한 늦가을의 이불을 끌어올려 제 몸을 덮는다.


 아프지 말아야지. 적어도 결혼하여 정당한 후계가 될 아이를 낳을 때 까진… 그때 까지는 아프지 말아야지. 다짐하듯 웅얼거린 영애는 제 방의 불들을 끌 생각조차 잊고서 곤히 잠들어버린다.






 우드득.


 어딘가가 시원하고 청량하기까지 한 소리에 재상은 눈을 느리게 꿈벅였다. 아, 정말… 하루에도 9만번 정도는 은퇴하고싶다는 생각이 떠오른다. 숨쉴 때 마다 은퇴하고 싶어진다. 재상을 할 만한 놈은 찾아보면 금세 생길터다. 일 잘하고 똑똑하지만 입 무겁고 조용하며 비위 좋고 강단 있는 재상이라. 후보들부터 추려서 밑에 뒀다가 황제폐하께 슬그머니 들이대볼까.


 “폐하, 퇴근시간이 지난 기분이 듭니다만.”


 저녁식사 시간이 지나도 한참 지났다. 지금 시간이면 야시장도 마감했을 시간이다. 억울함에 어깨를 떠는 재상을 아무 말 없이 돌아보던 황제는 눈썹만 조금 휘어보였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뭐랄까, ‘그래서 뭐 어쩌라고’라는 기색에 재상은 후보 조건에 ‘체력에 한계가 없음’을 추가해야겠다는 쓰잘데기없는 감상만 추가할 뿐이다.


 멍청하고 불쌍한 것들. 약을 쓰려거든 눈치를 보고 쓰던가. 신년파티가 코앞이라서인지 아니면 황제의 나이가 문제인건지 혹은 둘 다이거나 다른 이유를 더 찾은건지… 요즘들어 귀족들이 황후나 황비를 들여 재대로 된 후사를 보아달라 극성질 부리는게 아주아주 시끄럽다. 얼마나 시끄러운가 하면 황제가 직접 ‘전장 한복판보다 더 소란스럽다’며 대놓고 깔 정도다.


 “퇴근하지 말라고 한 적은 없지 않았나.”


 ‘지금 그 꼬라지를 하고 있는데 퇴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말인지 욕인지 모를 것이 목구멍까지 솟아올랐지만 애써 참아낸 재상은 제 외안경을 고쳐올린다. 눈앞에서 시원하게 목이 분질러져 죽은 여인은 축 늘어진 몸을 덜렁거릴 뿐이다. 뚝뚝 분질러져 죽은 이들의 시신이 몇구 더 보이지만 재상은 그것을 무기물쯤으로 여기는 듯 무감정하기 짝이없다.


 여러 가지 향기가 얽혀있지만 노골적인 미약의 향들은 어쩔 수 없다. 파마로사, 카다멈, 장미, 자스민… 향을 오래도록 뿌리고 독성이 쉽게 파고들도록 유황을 조금 섞은 모양이다. 치밀한건 좋지만 좀 무서운데. 방독면을 차고있는 상태임에도 찜찜함이 가시지 않는다.


 황제의 상태를 살핀다. 안색의 변화는… 본래부터 찾기 힘든 인물이니 넘어간다. 신체의 혈관이 두드러지고 근육이 심하게 부풀어오른 정도다. 체온이 오른 탓인지 숨은 거칠고 식은땀에… 이건 향 정도로 끌어낼 수 있는 반응이 아니다. 영악하게 황제의 술을 건드린 모양이지. 본래라면 혀만 대도 눈치챌 인물이나, 이맘때 즘에는 언제나 저기압이시니 알면서도 마셨을 수 있다.


 “다 치워.”


 그르르, 짐승이 우는 것 같은 명령에 재상은 고개를 끄덕인다. 침실 구석에서 바들바들 떨고있는 여인들은 그제서야 살았다는 기색을 드러낸다. 얼씨구, 사고를 친 주제에 뻔뻔하기 짝이없다. 평소라면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이셨을 분이 웬일로 살려두셨나.


 아니지, 이게 무슨 야만적인 생각인가. 자신은 눈에 거슬린다고 다 죽여대는 황제와는 다른 사람이다. 사람의 목숨은 지나가는 똥파리만도 못하게 생각하는 황제와는 다르다, 황제와는! 이게 다 잦은 야근과 스트레스 때문이다. 자신은 정상인이며 멀쩡한 사고를 보유한 사람임을 되뇌인다. 황제처럼 미치거나 맛이 간 것이 아니다.


 재상은 몇 번이고 자신을 다독이며 바깥에서 대기중인 시종들을 불러들인다. 재상처럼 원치않게 야근을 겪느라 안색들이 어둡지만 하나하나 신경써줄 상황이 아니다. 당장 제일 크고 무서운 상황부터 피해봐야 할 것이 아닌가.


 시종들은 눈치껏 들어와 뒷정리를 해낸다. 경험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럴 때 만큼은 웬만한 기사들보다도 담력있게 행동하는 시종들이 대견하게 느껴진다. 시종들의 손길에 반라의 여인들이 담요만으로 몸을 감춘 채 나가는 것이 보인다. 잘못의 유무를 떠나, 침실에서 소박을 맞다니, 참으로 서글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잠깐 한숨을 토해낸 재상은 사람이 모두 빠져나간 것을 확인하고서야 직접 침실문을 닫아 잠근다. 침실 내부의 창문들도 꼼꼼히 확인한다. 혹여 틈이 있을까, 잠궈진 창문을 힘을 주어 밀어보기까지 한다. 덜컥거리기는 하나, 단단히 닫혀져있다.


 “되었습니다.”


 재상의 말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황제의 신체 말단에서부터 불꽃이 타오르기 시작한다. 불을 다 꺼놓은 침실에서 환하게 타오르는 황제라. 처음에는 인체발화로 생각하여 질접했으나, 지금에와서는 가끔 보는 신기한 광경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제국의 황실에 비밀스럽게 내려져오는 혈통 같은 건 없다. 평범한 인간들이 세운 나라였으며 인간의 공으로 땅을 넓히고 권력을 유지했다. 종종 인간이 아닌것과 접촉했거나 그들로 인해 황위를 이어받는 이야기들은 있었으나… 솔직히 허무맹랑하기 짝이 없었다.


 황제 또한 재상과 비슷한 인식이었다. 본인이 그런 것에 엮이기 전까지만 해도 인간 외의 존재에 관련된 환상따윈 가지고 있지 않았다. 황자로 태어나 살기 위해 발버둥쳤다. 황태자가 되고 황제가 되어서도 전장에서 벗어난 전적이 없었다. 이렇다 할 ‘신비로운 것’과의 접촉은 전무했다.


 그러한 사내가 어찌 이리 되었는가. 말 그대로 불꽃이 되어버린 황제는 잠깐동안 손을 강하게 쥐고 펴더니 불꽃을 사그라트린다. 언제 타올랐냐는 듯 제 모습을 되찾는다. 빛과 불꽃이 완전히 사그라들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방 안이 컴컴해진다. 재상은 창문을 열어 독연기를 환기시킨다.


 “어찌하시겠습니까?”


 “집무실로 간다.”


 차분해진 황제의 목소리에 재상은 허리를 숙인다. 이틀만에 잠들었을 부관들을 깨우기엔 양심이 아프다. 자다 말고 일어나 일을 해봐야 효율이 좋지 않다. 새벽동안엔 황제의 확인과 승인이 필요한 일들만 꺼내놔야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 수 있으리라.


 “그녀들은 처분하겠습니다.”


 잠깐 재상을 돌아본 황제는 그리하라는 듯 손을 저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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