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을 입고 꾸미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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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더테일 AU 언더스트리트 드림. 원작 AU와는 아무 관련 없습니다.
언더스트리트 G (잭) x 드림주
신청자 : 김oo님
카플커프 공작은 공작위에 오른지 대략 18년 만에 처음으로 휴가를 내었다. 평소 그에게 제발 쉬어달라 읍소하던 집사는 물론이오 매일 매일이 과로사와 숨막히는 추격전을 보내던 행정관, 보좌관, 정보관, 측근기사 모두가 꿈과도 같은 상황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루도 비워진 적 없는 집무실이건만, 답지 않게 인기척하나 없는 광경에 노집사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세상에, 알투스시어. 평생 찾지도 않았던 신의 이름을 찾기까지 하는 집사의 눈에는 감격마저 맺혀있었다.
그를 처음 만났던 때가 언제였던가. 열 여섯? 열 일곱? 메마른 봄 무렵에 열 여덟이라는 대답을 들었으니 아마 열 일곱이었으리라. 뺨이 찢겨나간지 얼마 되지 않았다던 어린 청년은 피칠갑이 된 상태로 황제의 뒤를 걸었더랬다. 그 자리에 있는 모두가 ‘새로운 공작’ 에 대해서만 알고 있을 뿐, '어린 청년'에 대해서는 몰랐던 시기였다.
그런 그를 무릎꿇리고 검으로 어깨와 머리를 가볍게 두드린 황제는 “일어나게, 카플커프 공.” 이라는 말로 좌중을 경악시켰다. 겨우 기사 하나를 세우나 싶었던 상황에 갑작스럽게 ‘공’ 이라 불렀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그 자리에 시종인 척 자리하고 있던 노집사마저 안색이 희게 질릴 정도로 파격적인 인사였다.
황제의 부름으로 그를 처음 마주했을 때에는 어떠했던가. 공작저에 모셨던 이튿날에는 또 어떠했던가. 하루 하루가 살 떨리지 않는 날이 없었다. 카플커프 공작은 유능한 인물이었으나 기이하고 잔혹하며 엽기적인 행동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으므로 지근거리에서 그를 모시는 집사는 그의 이해할 수 없는 기행을 수습하는 일을 필사적으로 해낼 뿐이었다.
언젠가 황제가 그를 불러 “언제까지 혼자 살텐가. 아무것도 모르는 여식들이 얼굴만 보고 홀려있을 때 가는 편이 좋지 않겠나.” 라는 말을 했을 때, 공작은 “노총각인 황제께서 가시면 생각해보지.” 라는 말을 수 많은 귀족들이 있는 국정회의시간에 토해냈다는 말에 기함을 토하기도 했다.
온갖 영애들이 연서와 혼인동맹을 보내와도 시큰둥함은 물론이오, 침실로 뛰어들어 기정사실을 만드려했던 외국의 여인을 산채로 토막내어 요리해내다 못해 여인의 아비가 참석한 연회의 음식으로 내었을 때에는 집사 일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물론, 황제는 위 아래가 없고 역겹기까지 한 공작의 행동들을 모두 웃으며 넘기는 것은 물론이오, 기정사실을 만드려 한 외국까지 공작을 보내 쓸어버렸으므로 그에게 수면 위로 불만을 드러내는 귀족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토록 여인을 곁에 두지 않으니 황제와 공작이 그렇고 그런 관계라는 말이 퍼지거나 공작이 남색가라는 소문 또한 있었으나, 그 또한 공작이 솔선수범하여 소문의 근원지를 찾아 길거리에서 목을 친 이후로는 들리지 않게 되었다.
곱게도 아니고 훼까닥 돌다 못해 세상사를 뒤엎어대는 미친 자와 결혼을 하는 여인은 광인밖에 없으리라. 광인이 아니면 시체밖에 없으리라 그리 여기며 연애니 결혼이니 초장부터 신경쓰기는 커녕 시체만 만들어오지 않았으면 하던 때가 어제같은데. 번듯하다 못해 착하고 어여쁜데다 광견병 걸린 개새끼같은 공작을 한 손으로 틀어쥘 수 있는 아가씨를 결혼상대로 모셔오다니, 감격에 겨워 당장 숨을 거두고 성불해도 좋을 듯 싶었다.
“아버님.”
등 뒤에서 들리는 하녀장, 맏 며느리의 목소리에 집사는 짧게 한숨을 쉬고 몸을 돌렸다.
말이 죽고 성불이지. 아직까지 해야 할 일이 창창하게 남아있었다. 이대로 죽는다면 저승까지 쫓아온 황제와 공작에게 멱살이 잡혀 아무 몸뚱이에 되살아나 또 죽을 때 까지 부려먹혀도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준비는 되었느냐.”
“예.”
“가자꾸나.”
노집사가 ‘번듯하다 못해 착하고 어여쁜데다 광견병 걸린 개새끼같은 공작을 한 손으로 틀어쥘 수 있는 아가씨’ 를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일찍이 외출했다가 밤늦게 귀가한 공작이 현관을 지나자마자 내뱉은 한 마디 때문이었다.
“드레스를 알아봐.”
“예, 알겠습니…… 예?”
“대광장 2층에 입장할 수 있는 수준으로. 몸의 치수는 적어줄테니 참고하도록. 장식구는 적당한 수준에서 준비하는게 좋겠군. 한 종류로는 부족할테니 넉넉히 준비해.”
대광장 2층이라니. 그 곳은 부유한 평민이나 상인, 단승작위를 가진 귀족이나 출입하는 파티장이다. 대귀족이다 못해 황제의 총애 아닌 총애를 받는 카플커프 공작은 대광장이 아니라 황성의 파티장으로 가야하는 것이 아닌가? 혼란을 거두지 못한 집사는 눈치없다는 소리를 듣게된다 하더라도 물어볼 수 밖에 없었다.
“어디에 쓰시려 하십니까?”
“파트너.”
건국기념일 파티에? 대광장 2층에? 이미 건국기념일에 입고 갈 예복까지 모두 준비된 상태였기에 집사는 파트너라는 말을 재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파트너라는 말이 혹 대광장에 보낼 정보원인가 물어보려 했으나 공작의 표정이나 움직임은 일을 처리할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혹, 어느 분께서 입으실지 확실히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
그걸 왜 확실하게 알아야 하는가. 하는 공작의 시선은 따가웠으나 집사는 알아야했다. 집사로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노인으로서의 경험이 ‘재대로 알고 처리하지 않으면 큰 일이 난다. 겉잡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 는 경고를 쉴 새 없이 쏟아내었으므로 평소와는 달리 끈질기도록 물어보았다. 본래라면 ‘해라’ 와 ‘예’ 혹은 ‘알겠습니다.’ 가 전부였던 관계였으므로 두 번의 반문은 고작이라 불릴 횟수가 아니었다.
“드레스를 받으실 분이나 상황이 적절치 않으면 예의에 어긋남을 아시지 않습니까.”
“……씻겠다.”
“모시겠습니다.”
아랫것들 앞에서는 들려주지 않겠다는 은유적인 대답에 집사는 서둘러 하인들을 움직여 공작의 욕실을 준비시켰다. 목욕을 위해 시종인들이 서둘러 움직이는 것을 뒤로하는 공작을 따라 들어간 집사는 씻을 준비를 하는 공작의 탈의를 도왔다.
여느 공작가의 기사인 척 입은 제복은 그리 보이지 않으나 상당히 무거웠다. 겉으로 봐서는 상하를 나누지 않고 모두 같은 제복을 입는 듯 했지만 내부에서만 아는 표식들로 계급을 철저하게 나누고 있었다.
기사단의 주인이자 공작가의 주인인 공작은 복면이나 제복에 새겨진 공작가의 인장에 광택이 적고 색조차 조금 더 어두우며 기사에게 주어지는 어깨의 증표에는 아무 무늬 없는 단추만이 체워져있었는데, 얼핏 보면 입단한지 얼마 되지 않은 신입기사의 제복과도 비슷해보여 차이점을 아는 내부인조차 종종 헷갈릴 때가 있었다.
본래 단추의 자리에는 황제가 내린 증표가 걸려있어야 했지만 ‘무거운데다 쓸데없이 화려하고 거추장스럽다.’는 이유로 뜯어버렸으므로 집사의 현명한 판단력 아래, 보물창고에 조심스럽게 안치되었다.
옷을 벗는 잠깐 사이에 욕실의 준비가 끝났는지 부집사가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렸다. 집사는 부집사에게 들고있던 옷을 맡기고 공작을 모셨다. 공작은 타인이 제 몸을 건드리는 것을 지극히 혐오했으므로 목욕 시종을 들 것 까지는 없었다.
늙은 집사가 할 일이라고는 수건과 가운을 곁에 두고 하인들이 끌고 온 얼음잔과 술, 담배따위가 담긴 트레이를 검수한 후 침실의 테이블에 준비시키는 일 정도였다. 공작이 씻고 나왔을 때 가운을 풀어 몸에 걸쳐드리고 수건을 건네는 정도는 일 정도로 치지도 않았다.
피를 뒤집어 쓴 날이 아니라면 공작의 목욕시간은 30분을 넘기지 않았으므로 꼿꼿한 노인은 침실로 돌아가 소파에 불량히 앉은 공작을 위해 술잔을 체워 건넨 후 맞은 편에 조용히 섰다.
서기는 했으나, 공작의 이야기가 이어질 수록 충격과 경악 그리고 놀라움의 연속이었으므로 집사생활 평생 무너지지 않았던 평정어린 낯이 깨지고 말았다. 표정변화를 얼마나 힘껏 참았는지, 뺨과 입가, 미간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안쓰럽기까지했다. 공작은 노집사의 얼굴 근육들이 고생을 하건말건 신경조차 쓰지 않는 눈치다.
“최근 몇 주간 공작님께서 자주 외출하신 이유를 황제폐하의 명이라고만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 아가씨 때문이셨습니까.”
공작은 대답을 하는 것 대신 앉으라는 듯 술잔을 들어 제 맞은편 소파를 가리켰다. 본래라면 집사답게 행동해야 했으나 나이 든 몸은 정신적 충격을 온전히 견뎌내기 어려웠다. 약간 비틀거리는 몸을 소파위에 안착시킨 집사는 조금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집사치고 관심이 부족하군.”
비꼬는지, 평가하는지 확실치 않은 말이었으나 노집사는 제 자격이 상실된 것 같은 참담함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도 그럴것이 집사가 되어서 주인이 무얼하고 다니는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것은 실책이다 못한 무능함을 전시하는 꼴 아닌가.
변명을 하자면 못할 것도 없지만, 그렇게까지 주인의 시간을 빼앗고 싶지 않았다.
총체적 난국이 이런것인가. 노집사는 마른세수를 참기 위해 손을 꾹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공작을 모신 십 수 년 동안 모든 외출은 황제의 명, 업무, 일에 관련되었었다. 이른 새벽에 기상하여 기사단을 단련시키는 일 외에는 시답잖은 산책시간이나 티타임조차 가진 적이 없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모시기 편한 주인이다보니 태만해졌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언젠가는 ‘사지 멀쩡하고 혈기 넘칠 나잇대의 사내이니 오래 가지 않겠지.’ 라 생각했음에도 불구하고 온갖 귀족 영윤들의 구애나 추파에 아랑곳하지 않은 모습에 놀랐다. 아니, 오히려 가축이 제게 들이대는 것 마냥 상당히 역겨워하고 불쾌하게 여김에 기겁하기도 했다.
평소 사람을 대하는 것도 똑같은 ‘사람’을 대한다기보다 인간이라는 구분점을 가진 짐승을 대하는 듯 했다. 노집사 또한 그러한 태도가 은연중에 몸에 밴 사람이었으므로 익숙해지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은 것은 다행인가 불행인가.
그런 주인을 모시다보니 ‘결혼은 커녕 연애는 하시겠나.’ 하며 포기한 구석이 없지 않았건만, 무소식이 희소식이되어 기뻐해야할지 아니면 미친놈에게 걸린 여인을 안쓰러워해야할지 알 도리가 없다.
그러다 문득.
“혹, 귀족임을 계속 숨기실 생각이신지요.”
“…….”
“공작님.”
눈 앞의 상대가 제 주인이 아닌 아들이었다면 ‘이 후레자식 새끼! 넌 내 자식이 아니다. 굶어 죽던 앓아 죽던 나가서 죽어라!’ 라고 외쳤을터였지만 상대는 공작이고 제 주인이다. 눈앞의 사내는 사람을 도축하는데 그 무엇보다도 특화되어있는 인간병기다. 온갖 말들을 목구멍 안으로 콱콱 눌러내린 집사는 한숨 소리와 앓는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늦지 않게 밝힐 생각이다.”
“공작님의 진의를 파악하고 싶지는 않습니다만, 결혼식 전 날에 밝히시진 않으시겠지요.”
“…….”
그럴 생각이었나!
분명 '냐'로 끝나야 할 어미를 최대한 부드럽게 순화시킨 집사는 평생토록 건강한 몸에 갑작스러운 고혈압이 찾아오는 것을 느껴 입술을 힘껏 짓눌렀다. 제아무리 참으려 해도 안구에 힘이 들어가고 이마에 혈관이 솟는 것까지는 막아내지 못했다.
카플커프 공작에 관한 무시무시한 소문과 악의적인 이야기들을 생각한다면 숨길 수 밖에 없기는 하다.
그렇다고 계속 숨기고 만나게 하자니 그 끝이 어떻게 될지 너무나 훤했으므로 가만히 두고볼 수는 없었다. 공작이 빈 술잔을 내려놓고 담배를 찾자 자연스럽게 불을 꺼내 붙여주면서도 집사의 머리는 팽팽히 돌아갔다.
“공작임은 숨기셔도 귀족임은 밝히셔야 합니다.”
“의심을 살거다.”
그야 당연하다. 평민 기사로 알고 있는데 난데없이 ‘귀족’이라 밝히면 경계를 받을 수 밖에. 그 경계를 풀어내는 건 순전히 공작의 노력여하에 달렸다. 그런 것 까지 시시콜콜 연애사에 간섭하게 된다면 잘 되어도 본전, 못 되면 덤터기다. 노집사는 늦둥이로 태어난 손주를 오래오래 보고싶었으므로 공작이 바라는 ‘구체적인 파훼법’ 따위는 입에 담지 않았다.
그 대신 간접적인 꼼수를 입에 담았다.
“계승자격이 없는 귀족이라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통할지 모르겠군.”
단승작위로 이해할지 사생아로 이해할지는 모르겠으나 거짓말은 아니다. 이미 공작인 사람이 무슨 계승자격을 가지겠는가. 거기다 본래 태생이 평민이었으므로 별다른 계승자격이 없는 건 사실이다. 재대로 된 설명이 없는 것 또한 거짓말이지만 집사는 내면의 양심을 외면했다.
공작은 폐부 깊숙히 빨아들인 담배 연기를 뱉는다. 집사는 공작에게 스며든 담배의 찌든내를 처리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나 방에 붙은 테라스의 문과 창문들을 열었다. 한 여름답게 후덥지근한 밤공기는 썩 반갑지 않다. 그나마 공작의 방은 일 년 내내 항상 서늘했으므로 바깥바람이 섞였음에도 방 안의 공기가 그리 덥지 않아 위안이 되었다.
“내일도 나갈 예정이다.”
“시장 거리에 축제가 있다 들었습니다만, 데이트라도 신청하신 모양입니다.”
“…….”
왜 대답이 없느냐 짐승아.
설마. 그럴 리 없다. 노집사는 제 아내에게 청혼할 때에도 떨리지 않던 마음을 진정시키려 노력했다.
“모르셨습니까?”
“만나자는 말에 승낙하니 기뻐보이긴 하더군.”
세상에, 맙소사! 데이트 신청을 한 것도 아니고 데이트 신청을 받았단다! 뺨 한 쪽이 찢어진데다 특유의 서늘하고 오싹한 분위기, 습관적으로 구기는 눈매 때문에 도드라보이지 않지만 카플커프 공작은 ‘의외로’ 미남축에 속했다. 얼굴이 다 해내지는 않았겠지만 어느정도의 성과는 있었으리라.
수도 중앙시장 거리의 축젯날 밤이라면 예로부터 사랑이나 연인에 관한 유구한 역사(?)를 자랑했으나, 아주 어릴 때 부터 전장을 전전했을 공작이 그런 것을 알 리 전무했다. 축제에 대해 안다 하더라도 데이트 신청은 커녕…… 축제가 뭐 어쩌라는건가 하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오히려 이름 모를 아가씨가 공작에게 데이트 신청을 한 것이 다행이었다. 축제에 함께 가자고 할 정도면 관심이 있다는 소리렷다. 공작이 무슨 생각으로 승낙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좋은 시간을 보내기만 하면 될 일이다. 카플커프 공작이라는 인물 자체에 대한 불신이 있기는 하나 여태까지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은 채로도 잘 해왔지 않은가. 알아서 잘 하고 있는데 괜히 훈수를 두는 것 만큼 쓸데없는 짓이 없다.
아까까지만 해도 표정변화를 감추기 위해 얼굴 근육을 가만두지 못하던 것 치고 아주 환하고 인자한 낯을 보이는 집사의 모습이 묘하게 언짢아진 공작은 찢긴 뺨 속 잇새로 폐부를 가득 체운 담배연기를 밀어내었다.
인간의 형상을 띈 증기기관차가 떠오를법한 광경이었으나 집사는 그 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데이트 날까지 제복을 입으실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글쎄……. 내키진 않는군.”
“아가씨께서도 기대하시고 계실겁니다.”
본래라면 딱잘라 필요없다 말했어야만 하나, 고민을 하듯 목소리를 죽이는 공작의 모습에 노집사는 승리를 예감했다. 102전 102패. 공작의 옷을 지어올릴 때 마다 시착하지 못해 언제나 몸대중을 서는 하인이 있어야했던 때의 답답함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였다.
노집사는 고민을 하는 듯 손가락으로 소파 손잡이를 두드리는 공작을 설득하려 더 입을 열기보다 빈 술잔을 체우고 나이프로 안주가 될 치즈를 먹기좋게 잘라내었다. 담배를 입에 문 공작은 연기를 두어번 더 내뱉고나서야 입을 열었다.
“위화감이 없도록 할 수 있겠나.”
103전 1승 102패. 훌륭한 첫 승리를 가져간 노집사는 흐뭇하게 웃었다. 깨끗한 냅킨으로 나이프를 닦아내어 윤이 나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제 옆편 벽 언저리에 던져 퍽! 소리 나게 꽂아넣었음에도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의아함을 느끼지 않았다.
‘끄윽.’ 소리와 함께 가슴 한복판에 나이프가 손잡이까지 박혀, 앞으로 고꾸라져 쓰러지는 건장한 불청객에게조차 시선을 주기는 커녕 자리에서 일어나 예의를 갖추는 노집사의 모습은 여상스럽기까지 했다.
“맡겨주십시오.”
다음 날, 약속 시간은 노을이 지기 시작하는 시간이었으나 공작저는 이른 새벽부터 분주했다. 저택에서 일하는 하인들은 영문을 모르는 채로 서둘러 온갖 옷들을 옮겨야했다. 그 광경이 익숙한 공작가의 시착하인인 제이콥은 파리하게 질린 안색으로 부집사를 찾아갔다.
“부집사님!”
“아 제이콥, 마침 잘 왔네. 이 천좀…….”
“공작님께서 올해 건국 파티에 입으실 옷 시착은 끝난거 아니었습니까? 왜 또…!”
“아, 오늘 옷을 시착 할 사람은 자네가 아니야.”
“예? 아니, 저렇게 옷을 많이 꺼내는데 저 아니면 또 누가…… 헉, 설마 제가 이번에 쥴 주방장님의 살구타르트를 너무 많이 먹어서 잘린겁니까?”
“역시. 그 때 타르트는 자네가 다 먹었었군.”
헉! 자신의 잘못을 고스란히 토해낸 제이콥은 목을 졸린 사람처럼 헛숨을 들이키며 눈치를 보았다. 그 모습이 건장한 덩치와 근육에는 잘 어울리지 않았으므로 부집사는 하하하 웃음을 터트리며 제이콥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누가 입을지는 나중에 알기로 하고, 어서 이 천이나 옮기게.”
두툼한 천들을 건네받은 제이콥은 이윽고 자신을 대신해 옷을 시착할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고, 충격과 공포를 이기지 못한 제이콥을 위해 부집사는 타르트와 버터쿠키, 케이크와 마들렌 그리고 홍차를 준비해주었다.
제이콥을 두렵게 만든 장본인, 카플커프 공작은 이 날만을 기다렸다는 듯 온갖 옷과 천을 대보는 노집사를 말 없이 바라보았다. 분명히 ‘잠깐이면 끝날겁니다.’ 라던 말과는 달리 곧 점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부터 옷을 꿰기 시작하더라도 약속시간이 되기 전까지 바느질이 끝날 일이 없으리라는 것은 재봉에 문외한인 공작이라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그만할 때 되지 않았나.”
“크라바트까지만 보겠습니다.”
“아까 봤던 것 같은데.”
“그건 스카프였지 않습니까.”
심기 불편한 공작의 기세에도 노집사는 속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고 뒤에서 기다리고 있던 이에게 다음 천을 요구했다. 본래라면 엎어도 진즉 엎어버렸을 공작이건만 꾹 눌러 참고있는 것이 훤히 보였다. 다른 사람들은 노집사처럼 간이 배밖으로 나오거나 오늘내일 하는 삶이 아니었으므로 공작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시선을 가다듬었다.
“이건 크라바트가 아닌 것 같은데.”
“크라바트만큼 중요한 것이 장갑이 아니겠습니까.”
“…….”
“단추는 이런 것이 좋겠군요.”
“공작님의 피부색은 창백한 결이시니 그 색상보단 이쪽 색상 단추가 어울리십니다.”
“역시 전문가가 더 잘 아는군요. 부인의 혜안이 감탄스럽습니다.”
“후우…….”
카플커프 공작이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뱉고 나서야 한계가 찾아옴을 깨달은 노집사는 눈짓으로 사람들을 내보냈다. 저녁과 밤 시간 동안 입을만한 옷은 공작이 아침을 먹기 직전에 다 정해졌으므로 지금까지 했던 것은 공작에게 어울릴법한 것들을 솎아내는 일이었다.
십 수 년 동안 눈대중으로 파악하고 실제로 입은 모습들을 보며 노하우를 쌓아왔지만 종종 무언가 부족함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이 것만 맞추면 완벽할 것 같은데. 라는 아쉬움을 무시하며 어째 단 한 번의 손길조차 허락치 않으니 손수건이나 장갑만 물어뜯었더랬다. 종종 마차와 말을 다루는 마부가 ‘공작님께서 입으신 옷에 대해 몰래 왈가왈부하는 이들이 있다.’ 는 말을 전할 때 마다 얼마나 속이 끓었던가.
이제는 그럴 일이 없으리라.
지금 만나는 아가씨와 잘 된다면 이런 시간을 가지지 않을 리 없었다. 귀부인들의 지긋한 취미들은 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본인을 꾸미다 질리거나 본인보다 못하게 입은 남편과 아이들을 꾸미는 귀부인은 넘치도록 많았다. 아니, 오히려 본인보다도 더 꾸며놓은 채 만족하는 경우도 잦았으므로 상대가 평민아가씨라 하더라도 이러한 재미를 포기하리라고는 생각치 않았다.
“이른 점심을 내오라 할까요.”
“담배.”
‘담배 냄새를 싫어하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까지 간다면 이제는 공작도 참지 않고 노집사에게 물컵을 끼얹으리라. 자연스럽게 담배 케이스를 꺼내어 불을 붙이고 건네자 약간 누그러진 기색으로 받아문 공작은 준비되어있던 소파에 드러누웠다.
황제께서 하사하신 귀한 반가면을 쓴 채 소파에 누워 다리를 꼬고 담배연기를 토하는 모습은 지극히도 서늘하고 퇴폐적이다. 어느 곳에서나 안하무인에 소문은 지극히 나쁘고 손속조차 잔인하여 측근들조차 몸을 사리게 만드는 카플커프 공작이건만, 저런 모습에 반하여 주변을 기웃거리는 여느 영윤들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때 맞는 점심, 설득에 설득을 거듭한 목욕시중, 귀한 향유를 아낌없이 써가며 때를 빼고 광을 낸 공작은 머리카락 한 올까지 노집사와 사용인들의 섬세한 손길을 받아야만 했다. 중간 중간 고비가 있기는 했으나 피눈물나는 노집사의 읍소와 설득, 노력은 카플커프 공작의 심기를 가라앉히는데 결정적인 역할들을 차지했다.
“어떤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왼쪽.”
가면을 고르지 않은 것이 아쉬운 것인지 다들 시무룩하는 눈치였으나 공작의 선택이 번복되는 일은 없었다. 검은 복면으로 찢겨진 뺨과 함께 얼굴의 하관을 가린 공작은 여느때와 확연히 다른 제 모습이 비치는 거울을 흘긋 보았으나 별다른 평이나 반응은 없었다. 그저 제 검을 허리에 차고 유난히 투박한 장갑에 손을 끼워넣었을 뿐이다.
저택의 문 앞까지 주인을 배웅한 노집사는 수고했다는 말은 커녕 만족스러운 반응 한 번 없는 공작을 대신하여 하인들에게 수고비와 외박허가를 내려주었다.
쭉 뻗은 몸이 보기 좋은 갈색의 준마는 본래 공작이 타고 다니는 말이 아니었다. 덩치는 군마에 필적했으나 발을 내딛는 힘은 군마만큼 묵직하지 않았다. 그 대신 생긴 것이 순하고 갈기가 찰랑이는 것이 관리를 잘 받은 티가 났다.
본래 공작은 자신의 군마를 타려 했으나 주인만큼이나 사납고 흉흉한 기세를 가진 군마를 공용 마굿간에 두는 건 사고칠 자리를 마련해주는 일이었으므로 선택지에서 제외했다. 주인이 자신을 외면했다는 사실에 길길이 화를 내며 우는 소리를 내는 군마를 쿨하게 무시하기까지 했다. 군마를 대신해 불러낸 준마는 한참동안 무리의 우두머리인 군마의 눈치를 보았으나, 공작이 안장위에 올라타 고삐를 잡자 순순히 다리를 움직였다.
공작은 느긋하게 갈 생각이 없었으므로 이랴, 하는 소리와 함께 말을 달렸다. 군마만큼의 힘이나 박력은 없으나 속도만큼은 우세한 준마는 평민 기사를 흉내내기 위해 탔었던 합승 마차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조금 이르게 출발했다는 감이 없지는 않았으나 도착했을 때에도 해가 아직 한창이었다.
따가운 햇빛에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더위따위는 어찌되도 상관없으나 시야를 찌르는 환한 빛은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거대한 제국 수도 도서관 가까이 있는 공용 마굿간에 말을 맡기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을 때가 되어서야 주름진 미간이 미미하게 풀렸다.
발걸음이 향한 곳은 출입이 제한된 열람실이었으나 그의 발걸음을 의아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귀족들이 자주 드나드는 것을 봐 온 사람들은 시큰둥하게 자기 할 일이나 했다. 귀족만 나타나면 황송해서 굴러다니는 평민이 발에 채이는 광경 따위는 이 곳에서 찾아볼 수 없다.
어디 촌구석에 백국이니 공국이니 하는 영지만한 나라에서라면 구경할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런 시대착오적인 광경을 보고싶어 할 정도로 덜떨어지지 않았다.
열람실의 작은 문지기가 어디갔는지, 휑한 문 앞을 잠깐 훑어보던 공작은 제지하지 않는 다른 사서들을 지나쳐 걸었다. 눈치 빠른 몇몇이 그를 알아보았는지 아는 체를 하듯 인사를 건네왔으나 이렇다 할 반응은 없었다. 시선을 준 일이 없다는 듯 서늘하게 무시하는 태도에 기분이 나쁠만 하건만, 다들 그러려니 하는 눈치다. 오히려 인사를 잘 받아줬다면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 아닌가 하는 여론이 일었으리라.
공작은 전 날 까지 읽었던 자료를 책장에서 꺼내, 열람실에서 질리도록 머물렀던 자리의 의자에 앉았다. 본래라면 읽을 필요도 없고 쓸모도 없는 내용이었으나 누군가를 기다리기 위한 시간낭비 용도라면 나쁘지 않은 수준이었으므로 한 글자 한 글자 느긋하게 읽어내렸다.
전체적인 내용은 이미 외우고 있었으므로 글자 하나하나를 기억과 대조하여 읽어내리는 일은 생각보다 지루했다. 첫 장 부터 느긋하게 시작한 기억력 테스트가 책 중간즘까지 실점 하나 없을 무렵, 낯익은 인기척이 제 감각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느껴졌다.
“세상에, 잭?”
“음.”
이제 이건 필요없겠군. 자료서적을 덮은 잭이 고개를 들자 여태까지 무슨 일을 했는지 지침과 피곤함이 묻어 꼬질거리는 평민 사서 여인이 한 명 서 있었다.
“잭 맞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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