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을 원망합니다. 원망하지 않으려 했으나 부질없었습니다. 공작새의 깃처럼 눈에 띄는 장식으로나마 살 수 있었던 시절이 나에게 평온이고 평화일 줄 몰랐습니다. 차마 몰랐습니다. 이는 내 아둔함 때문인지요.
사랑은 없으나 예의는 다하겠노라 약속했던 첫 만남을 기억합니다. 가문의 잇속을 위한 만남이라 한들, 사람으로서 혼인한다면 응당 그리해야 한다 하였고 나 또한 그러리라 약조하였지요. 나의 말에 조용히 만족하던 당신을 기억합니다. 우리는 좋은 부부이자 동반자가 되리라 이야기하던 당신의 말은 참으로 듣기 좋았습니다.
나는 가슴이 뛰는 사랑에 관심이 없었으니 이만하면 되었다 여겼습니다. 남편으로서, 부인으로서. 서로의 자리를 채우며 그리 살면 되리라 생각했음이 내 순진함 때문인지요.
당신과 이름 모를 여인이 오후의 파티에서 빠져나와 밀회를 즐기며 마주 안던 자리의 풍경을 아시는지요. 한철 봄의 꽃들이 얼굴을 잃은, 큰 나무의 잎사귀에 비친 희고 흰 햇빛이 도리어 꽃처럼 보이던 때를 나는 잊을 수 없을 겁니다. 한철 여름을 기다리며 꽃망울을 준비하던 장미의 잎사귀 속 날카로운 가시만이 내게 박힌 듯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겨울 눈 가득한 곳에 홀로 선 사슴이라 하였을 때, 비꼬는 말임을 몰랐습니다. 응당 짐승도 짝을 지어 지내는데 결혼을 했음에도 홀로 지내는 여인을 비웃는 말인 줄 몰라야 했습니다. 턱 끝까지 치솟는 울분을 떫은 와인과 함께 내리누르는 서글픔을 당신은 평생 몰랐으면 합니다. 알게 된다면 혹 지금의 나를 동정할까 그렇습니다.
사랑은 없으나 이해가 있고 정열은 없으나 믿음이 있는 여느 귀족 부부의 삶에 나는 만족했습니다. 당신 또한 그만하면 충분하리라 생각했으나 이는 내 자만이었나 봅니다.
나는 자만했던 대가로 내가 상상하거나 생각해보지 못한 광경을 많이도 보고 말았습니다. ‘사내라면 응당 여러 여인을 만나보아야 한다.’ 는 말을 경멸하던 당신 또한 고작 사내임을 잊은 탓이겠지요.
부부동반이 필요치 않은 자리에는 동석하지 않던 당신을 압니다. 세간에 사이 나쁘기로 유명한 부부조차 손을 잡고 입장할지언데, 나는 긴 시간 남편이 있음에도 홀로 발을 내디뎌야 했습니다. 내가 홀로 모욕을 감수하는 동안 당신은 스스로 약속을 진창에 처박았습니다.
이제 헛된 기대를 접으려 합니다.
당신이 다른 여인을 만나고 정부를 들이고 자식을 보아도 나는 괜찮아야만 했습니다. 세상은 사내의 부정을 용서할지언정 부정을 용서치 않는 여인은 용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당신의 아이는 나의 아이가 아닙니다. 나는 정부가 아니고 창부 또한 아닙니다. 불륜으로 태어난 자식을 내 품에 안기려는 당신을, 나는 무어라 불러야 할는지요.
약속을 어기고 서약을 더럽혀 태어난 핏덩이를 안아야 한다면 나는 부인이기를 그만두려 합니다. 당신이 아끼는 여인에게 내 자리를 물려주려거든 그리하시지요. 나의 손이 닿은 것은 보좌들이 모두 처분했을 테니 물려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됩니다. 혹, 이를 낭비라 생각했다면 당신은 내 생각 이상으로 옹졸한 사람이겠지요. 이를 모르고 떠나는 것이 다행입니다.
나는 당신과 정부를 위한 축복을 기도하지 않을 겁니다. 하나 한 가지 기원을 남길 수 있다면 당신의 어린 것이 건강하길 빕니다.
- 전 부인, 플루비아 마리아 리베라타 드 피데스.
여인은 펜촉에 남은 마지막 잉크로 처녀 시절에 사용했던 제 이름을 새겨넣었다. 한 줄기의 균열 없는 얼굴은 얼음으로 조각한 듯 차디찼으나 눈동자만큼은 피곤함을 감추지 못했다.
탁상 위를 밝히는 촛불은 은은했으나 환하지는 않았기에 가라앉은 햇빛을 등진 여인의 어두운 속내를 밝게 비추지 못했다. 고급스러운 종이를 펜촉으로 난도질한 자리에 잉크가 스며드는 과정은 느렸다. 여인은 그동안 제 방을 느리게 돌아보고 크게 한숨을 토했다. 짧은 새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가볍게 쓸어올리자 머리가 지끈거린다.
몸이 무른가 하면 그렇지만은 않다. 비슷한 나이 또래의 부인 중에서는 건강한 축이다. 일 년간 몰아친 일들이 심신의 평화를 앗아가기는 하였으나 평생토록 관리해온 몸이 쉬이 꺾일 리 없다. 여인은 잉크가 충분히 마른 종이들을 봉투에 담았다. 본래라면 ‘부인’으로서 실링을 녹인 자리에 반지의 인장을 찍어야 했지만 내키지 않았다.
가느다란 손이 천장에서부터 늘어트려진 줄을 잡아 두어 번 당기고 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좌가 찾아왔으므로 여인은 망설임 없이 실링 없는 봉투를 건네었다.
“인장 없는 실링으로 봉하게.”
“수신인은 누구입니까?”
“둑스 크레덴티아. 수신일은 두 달 뒤로 해주게.”
“예, 부인.”
의아할법한 명령이건만 보좌는 단 한 번의 의아함이나 머뭇거림이 없었다. 크레덴티아 부인의 보좌들은 하나같이 이러했으므로 놀라운 일은 아니다. 여인은 곧 ‘전 부인’이 되겠지만 그마저도 상관하지 않는다. 그들을 거둔 것은 크레덴티아의 영주이지만, 그들이 충성하는 이는 크레덴티아의 안주인이다. 여인이 물러난 빈자리에 누가 들어서건 전 부인의 보좌들은 새로운 주인에게 충성하느니 좌천을 선택하리라.
보좌의 유능함을 아는 여인으로서는 안타까운 일이다. 하지만 이혼을 하게 되면 남의 집안 이야기가 되므로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주인으로서는 끔찍하리만치 무책임한 일이지만 이미 끝난 이야기다. 보좌들 모두 여인을 탓하지 않았다. 가해자가 따로 있는데 어찌 피해자를 탓할까.
여인은 온기 없이 바짝 마른 자신의 손을 쥐었다 편 뒤 꾹꾹 눌러 마사지했다. 곱게 관리되었으나 평생 펜을 쥔 탓에 약하게 휜 손가락이 저렸다. 핏기가 부족해 창백한 손을 열심히 움직여대면 그럭저럭 혈색이 오른다. 시녀가 찾아와 문을 두드릴 때까지 여인은 제 손을 연신 곰실거렸다.
“부인, 카스테입니다.”
“들어오거라.”
문을 열고 들어온 시녀는 여인에 비하면 어려 보이나, 앳되지는 않았다. 단정한 드레스를 입은 몸은 곧고 치맛자락 아래에서는 발걸음 소리조차 나붓하니 조용하다.
여인은 응접용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환기를 위해 열어둔 테라스와 창문 너머에서 스미는 소리가 불쾌해 눈을 찌푸리자 시녀는 서둘러 창문을 닫고 커튼을 늘어트렸다. 둑스 크레덴티아와 그의 정부가 산책하며 시시덕거리는 소리를 굳이 들어줄 의무 따위는 없었다.
시녀는 마지막 커튼을 내리기 전, 저 있는 자리를 흘긋 올려보던 정부의 눈을 마주쳐 눈을 찌푸렸다. 어떤 인물이건 간에 시녀는 ‘저것’을 혐오했다. 제 인생의 은인이신 분의 영예를 갉아대는 송충이 따위를 기꺼워할 사람은 없다. 짓누르거나 쳐 죽이지 않는 것으로 제 자비는 다 한 것이다.
“해가 오래 뜨기 시작하니 벌레들이 기승이네요. 하녀들에게 일러 벌레 쫓는 향을 피우라 해야겠어요.”
“여름의 벌레만큼 성가신 것이 없지. 그러도록 하렴.”
“아쿠아스 부인이 헤셀트 영지에서 쉬고 있다 전보를 보내왔답니다. 금방 다시 이동한다고 하였으니 지금쯤이면 렌든을 지나고 있겠지요.”
“플라망 외곽에 무법자들이 기승이라는데, 걱정이구나.”
“아쿠아스 경과 기사들이 철통처럼 호위하는걸요. 무법자들이 더 걱정이지요.”
여인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시녀는 칭찬을 받은 아이처럼 뺨을 미미하게 붉혔다. 약간 새치름한 인상임에도 이때 만큼은 순하고 사랑스러워 보였기에 여인은 옅게 웃어 보였다.
“여행 준비는?”
“부인께서 명하신 대로 되었습니다. 바다로 가는 건 꽤 오랜만이네요.”
“마차를 쉬지 않고 가야 2주 거리이니 자주 갈 수 없었지. 다른 부인들에게 휴가를 주지 않았다면 이번 하펜행도 어려웠을 거란다.”
“그렇지요. 하지만 가 볼 값어치는 충분해요! 거기서 먹은 소테가 정말 좋았는걸요. 생선에 대한 편견을 멋지게 물리친 요리에요.”
두 눈을 빛내며 이야기하는 시녀, 안네는 설렘이 가득해 보였다. 여인 또한 하펜의 요리에 푹 빠졌던 시절이 있었으므로 안네의 기대를 공감할 수 있었다. 항구도시 특유의 요리는 여타 내륙도시의 요리들과 결이 다르다. 제아무리 돈과 시간을 들여 비슷한 맛을 재현한다 한들 결정적인 차이는 메워지지 않는 법이다.
여인은 짜디짠 소금의 냄새, 높게 나는 새들과 끝없이 펼쳐지는 물, 해수면 너머로 사라지는 태양 빛 따위를 떠올렸다. 이전의 기억을 떠올렸을 뿐임에도 눈이 부시고 황홀하다. 옅은 파도가 발목 위로 밀려들고 하얀 포말이 발등 위에서 녹아 사라지던 간지러움을 떠올려보았다. 가슴을 묵직하게 누른 채 버티고 있던 응어리가 기억에서 밀려드는 파도에 쓸려 내려간다.
“하펜의 항구와 해안도 매력적이니, 별장에 머무는 동안 카스테 경과 데이트라도 즐기렴.”
“저는 그이보다 부인 곁에 있는 게 편하고 좋은걸요.”
“다른 부인들처럼 휴가를 주지 못했지 않니. 가끔은 부부끼리 오붓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지.”
“부인과 데이트하는 건 안 될까요?”
“카스테 경이 질투할까 무섭구나. 내 호위 중에 경보다 강한 자가 없으니 장갑이라도 날아들면 감당하기 어려워.”
“장갑이라니, 그이가 그럴 리 없지요.”
안네는 퍽 재미없는 농담을 들은 듯 쓰게 웃었다. 제 남편이 질투할 리 없음을 굳게 믿는 눈치다. 여인은 이내 안타까움을 속으로 삼켰다. 그 무뚝뚝한 기사는 언제쯤 제 부인에게 믿음을 안겨줄 수 있을는지, 걱정스러울 따름이다.
제 부부관계조차 지켜내지 못한 이의 걱정과 간섭은 독이 되리라. 여인은 굳이 말을 더 얹지 않으려 이런저런 말을 혀로 눌러 죽였다. 안네와 결혼할 수 있게 도와달라 무릎 꿇던 젊은 기사는 제 남편과 다르다. 제 어린 시녀는 절대 제 꼴이 나지 않으리라.
언젠가의 여인은 사람을 믿었다. 선의와 약속이 절대적이라 여겼다. 제 남편 되는 자가 불륜을 저지르고 정부를 들여 그것과의 사이에서 난 자식을 제 자식으로 만들려 들지만 않았더라도 제 믿음은 굳건했으리라. 안에서 깨진 믿음은 제 것 아닌 관계조차 의심하도록 불신을 산란시킨다.
여인은 속으로 탄식했다. 나는 주변 사람마저 편히 바라보질 않는구나.
“와인을 가져오렴.”
“예, 부인.”
여인은 본디 술을 찾거나 즐기지 않았다. 근래에 들어서 술잔을 기울이기는 하나, 한 병조차 비우기 어렵다. 맛도 맛이거니와 술에 취한 감각은 더없이 불쾌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술을 찾는 이유는 헛생각 없이 잠자리에 들 수 있기 때문이다.
해가 완전히 저물어버리자 커튼 사이로 스미던 빛마저 사그라든다. 방 안이 어둑하다. 탁상 위의 촛불은 건드린 기억이 없음에도 차게 꺼져있었다. 여인은 어두운 탁상을 바라보다 헛웃음을 지었다. 불붙인 이는 있어도 꺼트린 이는 없는 것이 마치 제 처지 같았다.
본래라면 시녀들이 발 빠르게 사람을 부려 방 안을 밝힐 테지만 지금은 아무도 없어 어둠이 깊다. 여인은 그 어둠 속에서 눈을 내리감았다. 정신은 또렷한데 세상이 물에 잠긴 듯 막막하다. 막연히 두렵고 무한히 불안하다. 열다섯, 고향을 떠나 타지에 홀로 시집온 그날만큼이나 숨이 막혔다.
질식해 죽지는 않을까. 생각마저 어둡게 침잠할 즘 묵직한 노크 소리가 들렸다. 처음에는 생각이 끊기고 그다음에는 눈이 뜨였다. 세 번째 노크가 울리고 나서야 여인은 입을 열었다.
“…… 들어오게.”
꼴 보기 싫은 자가 찾아왔으나 얼굴을 보지 않고 내쫓을 수 없는 것이 아쉽다. 여인은 잠시 힘 빠진 몸을 바로 세워 곧게 앉았다. 익숙하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낯익은 사내를 눈에 담자마자 미간이 뱀의 꼬리처럼 꿈틀거렸다.
여인의 공간이 제 것인 양 성큼성큼 들어서는 뒤로 하녀들이 재빠르게 들어와 어두운 방을 밝혔다. 귀하디 귀한 야광석들이 보석처럼 빛을 뿌리니 눈이 부시다. 어두운 것에 익숙해져 있던 여인의 눈이 절로 일그러졌다. 불쾌함과 짜증, 귀찮음을 숨기고 있지 않아 평소보다 날 선 모습임에도 남편이라는 자는 오히려 기꺼워 보인다.
“부인.”
“무슨 용무인지요.”
“와인을 한다기에, 대작 상대가 필요할까 싶어.”
역적 같은 놈이 대작 같은 소리를 하니 얼굴이 심상치 않게 구겨지려 했으나 참았다. 욱하는 감정을 애써 눌렀다.. 제가 이토록 감정적인 줄 몰랐다. 평생 몰라도 될 부분을 알게 되는 건 티끌만치도 기쁘지 않다. 솔직히 말하면 평생 입에 담아본 적 없는 된 발음의 욕이 터질 것만 같다. 하지만 귀부인으로서 상스러운 소리를 할 순 없는지라, 한숨과 함께 비꼬기만 했다.
“와인은 밍밍하다 하지 않았나요.”
“당신에게 맞추는 정도야 어렵지 않소.”
“놀랍군요.”
평소 반 브루에(브랜디) 만을 찾던 자가 이제 와 와인을 대작하겠다니. 여태껏 파티에서 와인 한 잔조차도 겸상하지 않았던 사내가 맞던가. 여인은 허락 없이 제 가까이에 앉은 남편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안네의 자리에 떡하니 앉은 꼴을 보고 있자니 가증스러울 뿐, 긍정적인 감정의 편린조차 샘솟을 기색이 없다.
하녀들이 발 빠르게 차려둔 술상은 쓸모없을 정도로 정찬에 가깝다. 남편이 지시했으리라 생각하니 빈속에 구역질이 난다. 어두운 방에서 조용히 와인잔을 비우다 잠드는 평온마저 방해하는 낯짝이 어찌 예뻐 보이랴. 능숙하게 와인병을 따, 두 유리 잔에 따르는 꼴을 보고 있자니 멀끔한 얼굴에 와인을 끼얹고 싶어졌다.
“당신의 시녀는 눈이 높아. 슐로스의 레제를 덥석 고르더군.”
“제가 마실 와인이니 아무것이나 고를 수 없지요.”
여인은 제 앞에 놓인 와인잔을 집어 들었다. 남편이 멋대로 잔을 부딪치고는 가볍게 들어 올려 보였다. 응해주지 않으니 빤히 바라본다. 시비를 거는 건가 싶을 정도다.
“오피니아가 그러더군, 당신 시녀가 자신을 무시한다고.”
아니. 시비가 맞았다.
“피해망상이 심하군요.”
“당신이 시녀를 타일러줄 순 없겠소.”
“시녀의 개인적인 감정까지 간섭할 생각은 없습니다.”
귀족은 사람일 뿐 신이 아니다. 신이라 하더라도 사람의 감정을 쉬이 다스릴 수 없다. 그 증거로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베어 물었지 않은가. 제 눈엣가시인 이를 싫어하는 시녀를 타이르라니. 웃기는 소리다.
“우리 아이를 가진 이가 아니오.”
“당신의 아이겠지요.”
“부인.”
“이 이야기는 끝난 게 아니었나요? 대작이 아니라 싸움을 하러 왔군요.”
벌써 목소리에 피곤함이 묻어난다. 들고 있던 잔을 내던지고 싶어져 내려놓았다. 지근거리에 앉은 남편에게서 낯선 향이 난다. 조금 전 까지 그것과 사이좋게 정원을 거닐었다는 걸 자랑할 셈인가.
“이 이야기를 계속할 셈이라면 나가세요.”
“플루비아.”
“내 말 안 들리나요? 다시 한번 이야기해주죠. 그것의 배에 든 핏덩이 따위엔 관심 없으니 나가세요.”
“그렇게도 받아들일 순 없는 거요? 내 뒤를 이을 아이가 당신 배를 빌어 태어나지 않는 게 그렇게 아니꼬운 건가? 어찌 그 작은 생명을 핏덩이라 부를 수 있는지 알 수가 없군.”
아, 여인은 제 남편이라는 작자의 아랫도리와 혀를 뽑아버리고 싶어졌다.
“당신이 아이를 키우지 않아도 좋다 했잖소. 오피니아가 낳은 아이를 적손으로 들이 자는 게 그리 어려운 거요? 당신이 가지지 못한 걸 가진 약자에게 화풀이라도 할 셈이라면 그만두시오. 없어 보이고 치졸해 보이니까.”
아니, 그냥 죽이고 싶다. 어떻게든 아랫도리를 놀려 자식을 만들어오는 저자가 역겹다. 한 공간에 있는 것도, 눈을 마주하는 것도, 같은 공기를 마시고 대화하는 그 모든 것이 역겹다. 이런 상태일진대 어찌 그를 남편이라 부르고 그의 곁에서 평생을 함께하겠는가.
“나는 그것에게는 아무 관심이 없습니다. 누구를 만나고 배를 맞춰 뒹굴다 배가 불러 자식을 낳건 말건 무슨 상관이랍니까. 화를 품는 것도 관심이 있고 신경을 써야 할 수 있는 일이지요.”
“아예 없는 사람 취급이라도 하고 있다는 거요?”
“그것이 감히 당신을 거절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 않으니 최소한의 자비를 내린 것이지요. 제가 진심으로 신경 쓰길 바라는 것도 아니시면서 참으로 뻔뻔하십니다.”
“지금 그게…….”
“아니면 제가 스테파노 주교님을 찾아가지 않는 걸 보아, 어찌어찌 구슬리면 입적까지 수월하리라 생각하신 건지요.”
“플루비아!”
여인은 독실한 신자가 아니다. 남편 또한 그러하다. 하나 대귀족의 혼인에는 교회가 필요하며 주교의 앞에서 결혼을 맹세할 기회는 단 한 번뿐이다. 심지어 하느님의 이름 아래에 다른 이와 동침하지 않는 것을 맹세하지 않았는가.
유명무실하더라도 규율은 규율. 암암리에 일어나 쉬쉬하고 덮어주는 것이 불륜이더라도 쉬이 용납되지 않는 순간이 있다.
여인이 평생의 명예를 포기한 채 주교를 찾아가 남편의 부덕함을 알리는 순간, 크레덴티아는 대대로 손가락질받는 더러운 가문이 되리라. 맹세를 더럽힌 공왕은 부덕한 자로 역사에 남을 것이오, 정부는 사내를 홀린 마녀로서 배 속 아이와 함께 화형당할 터.
교회는 중혼을 허락하지 않는다. 본처를 내치고 재혼한 들 혼인성사를 내려줄 성직자가 있을 리 없다. 결국 나이 든 수도사를 구하여 세례를 받아야 하나 이는 반쪽짜리 성사이니 그 자식은 귀족 명부에 기록되지 못한다. 남편도 이를 알고 있으니 물고 늘어지는 것일 터.
사생아라 하더라도 성인이 될 때까지 적손이 없을 시, 후계자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될 수 있다’ 는 ‘인정받는다’ 가 아니다. 사생아 출신의 후계자는 평생토록 정통성을 의심받는다. 방계의 괄시는 물론이거니와 사교계에서조차 자연스럽게 매장된다.
크레덴티아의 사생아는 가문의 이름값이 있으니 대놓고 무시당하지는 않겠지만 은근한 따돌림까지는 피할 수 없으리라. 이를 피할 방법은 오로지 적자로의 입적뿐. 여인은 싸늘히 식은 눈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꼴불견의 눈을 노려보았다.
“내가 그 사생아를 안아줄 일도, 불륜으로 더러워진 당신과 뒹굴 일도 없을 겁니다.”
“…후회하게 될 거요.”
후회? 고작? 여인은 바람 빠지는 소리와 함께 제 남편이었던 탕아를 비웃었다.
“그깟 건 지금도 하고 있으니 상관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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